봉제노동자들 다시 일어섰다
봉제노동자들 다시 일어섰다
  • 이수호
  • 승인 2018.12.0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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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호 칼럼] 만약 전태일 이 자리 있다면 무슨 말 했을까?

48년 전 11월 27일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창립한 날입니다. 전태일이 분신항거한 지 14일 째, 그의 검게 탄 시신을 마석 모란공원 차가운 땅에 묻은 지 열흘도 안 되어서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과 친구들이 주도했지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마지막 유언의 실천이었습니다. 자기 몸을 불살라 스스로 불씨가 된 전태일은 그렇게 횃불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캄캄한 70년대를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지난 11월26일 있었던 예수살기 10주년 후원의 밤 행사에서 왼쪽부터 양재성님, 박성율님, 이수호님, 조헌정님이 함께 했다.
사진은 지난 11월26일 있었던 예수살기 10주년 후원의 밤 행사에서 왼쪽부터 양재성님, 박성율님, 이수호님, 조헌정님이 함께 했다.

그리고 48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11월 27일, 땅거미가 내려앉은 청계천 3가 종로파고다타워 1층 서울일자리지원카페에는 나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노장년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투쟁조끼를 입은 노조 활동가로부터 최신 유행의 멋쟁이까지, 종잡을 수 없는 무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50대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묘한 모임이었습니다.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가 창립총회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48년 전 그날을 생각하며 잡은 날이었습니다.

전태일 분신항거 직후에 결성된 청계피복노조는 전두환 정권 시절 강제 폐쇄조치까지 당하는 탄압을 받기도 하는 등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변화로 의류산업이 쇠퇴하고 대부분의 큰 공장마저 인건비가 싼 해외로 이전하면서, 청계피복노조의 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드디어는 청우회라는 친목단체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봉제사업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봉제노동의 현실은 그다지 크게 변한 게 없습니다. 다락방 먼지구덩이 속에서 혹사당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시다’들은, 창신동의 꼬불꼬불한 골목 지하실 비좁은 작업의자에 앉아 미싱을 타는 ‘늙은 미싱사’로 변했을 따름입니다. 봉제사업과 봉제노동의 현장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여전히 쌓여 있습니다. 장시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일이 없으면 자동으로 해고당하는 객공시스템의 불합리 속에서, 하청의 하청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단가 인하 경쟁은 최저임금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작업 현장의 열악함 속에서 4대 보험마저 보장되지 않으니 어떤 청년노동자가 새롭게 찾아오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사업체는 점점 더 영세해질 수밖에 없고 노령의 가족 단위나 이주노동자의 몫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는 봉제노동자가 서울에만 9만 명이 넘고, 이 중 90% 가까이가 10인 이하 사업장이라니 그 실태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전태일 동상
전태일 동상

48년 전 그때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전태일이 자신을 태워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 촛불은 전태일 정신이 됐습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은 많은 시대의 전태일들이 다시 촛불을 들고 나서고 있습니다. 전태일재단이 나서고 전국화학섬유식품노동조합이 나섰습니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함께하고 구로근로자복지센터 등 많은 지역모임들이 나서서 ‘9만 봉제노동자 권익향상을 위한 공동사업단’을 꾸리고 ‘서울봉제인지회와 함께하는 서울지역풀뿌리연대모임(봉제인의 친구들)’을 결성했습니다. 시대의 어려움은 그 시대의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시대의 전태일은 그 시대의 밝은 연대의 촛불로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영세 사업장인 서울봉제인지회가 10인 이하 사업장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구분 없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하청 비정규노동의 특성을 고려한 적절한 조치로 새로운 시대의 다양한 노동의 특성을 고려할 때도 획기적으로 평가됩니다. 또한 자주적인 노동조합 활동과 함께 자조적인 공제회 기능도 겸해서 조직을 운영하려는 계획도 아주 현실에 맞는 바람직한 시도라 생각됩니다.

서울봉제인지회의 창립총회와 축하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전태일의 분신 때도 옆을 지켰던 친구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습니다. 48년의 세월은 겉모양은 어느 듯 흰 머리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70대 노인으로 만들었지만, 마음과 기개만은 그 시절의 20대 초반의 새파란 젊은이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만약 전태일이 이 자리에 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노동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공정하며 상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회보장 방법으로써 보충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여기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세계인권선언 제23조 3.4항)

<전태일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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