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이 우리를 쏘아 죽였단다’ 내용의 자장가까지 있어”
“‘한국군이 우리를 쏘아 죽였단다’ 내용의 자장가까지 있어”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18.12.0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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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상임이사-2회

<1회에서 이어집니다.>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상임이사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상임이사

- 1968년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들려달라.

▲ 퐁니⋅퐁넛 마을은 1968년 음력으로 1월 14일에 한국군에 의해 학살이 일어나 주민 74명이 희생된 곳이다. 마을근처 도로가에 미군초소가 있었는데, 미군들은 마을이 불타는 연기를 보았고 총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미군이 뒤이어 마을로 들어왔지만 학살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어느 미군병사는 학살 현장 사진을 찍고 있었고, 아비규환이 된 마을에는 총탄을 맞아 부상당한 주민도 있었다. 어떤 미군은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아주었고 나머지 사람은 헬기로 태워 병원으로 후송했다. 주민들은 시신들을 불에 타다 만 해먹이나 박스에 넣어 미군초소로 들고 와 미군에게 거세게 항의했지만 초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진상이 밝혀졌나.

▲ 문제는 퐁니⋅퐁넛 마을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상당수가 미군과 동맹인 남베트남 군인가족들이라는 점이다. 군인가족이 아니었다면 미군이 이 사건을 조사하지도 않고 묻혀버렸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 사건은 동맹군 가족을 죽인 사건이었고, 유가족들은 다른 학살보다 더 억울해 했다. 결국 미군감찰부가 진상파악에 나섰다. 미국은 우리와 달리 정보공개법이 있어서 기밀서류도 30년이 지나면 공개된다. 2000년대 초반 들어 베트남전 관련 기밀문서들이 대거 공개됐다. 그때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학살문제 등 서류를 조사하러 한겨레신문과 연구자, 시민단체들이 미국으로 갔다. 여기서 퐁니⋅퐁넛 학살문서가 발견됐다. 그게 한국사회에 한때 널리 알려졌다.

 

- 베트남에 "한국군이 우리를 쏘아 죽였단다"는 내용의 자장가가 있다는데.

▲ 베트남 꽝응아이성에 ‘빈호아(平和)라는 마을이 있다. 베트남에는 유독 ‘평화’(빈호아)가 들어가는 지명이 아주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학살이 많았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미군과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들은 몸에 수류탄을 매고 육탄으로 미군 탱크들을 여러 대 잡았다’거나 '소총으로 미군 헬기를 격추시켰다'고 증언을 한다. 상당히 큰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반뜨엉’ 전투다. 베트남 전투사에 기록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이곳은 또 한국군 청룡부대 주둔지였다. 전투 당시에 빈호아 마을 입구 초입에 미군이 폭탄을 투하해 커다란 흙구덩이가 생겼다. 나중에 한국군이 마을 초입에 오가던 주민들을 붙잡아 모아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으로 쏘거나 수류탄을 던져 학살했다. 이곳도 빈호아 학살의 한 지점인데, 여기 쭈옹딘 폭탄구덩이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36명이었다. 주민에 따르면 빈호아 마을에서는 다섯 지점에서 학살이 일어나 모두 430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 왜 자장가에 그 내용이 삽입됐을까.

▲ 빈호아 마을에는 140여 명이 죽은 곳도 있고 130여 명이 죽은 곳도 있다. 학살에 대한 사연도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왜 쭈옹딘 폭탄 구덩이가 자장가로 불려졌을까. 제가 그 마을을 일일이 다니면서 추측했던 것은 마을을 가려면 초입에 길이 한 곳 뿐이고 타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라는 점이다. 한국군은 초입 길에서 붙잡힌 민간인들을 학살한 다음 시신을 흙으로 덮어버렸다. 나중에 한국군이 철수하고 난 다음 구덩이를 팠을 때는 시신이 모두 썩어버려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뼈만 발견됐다. 신원확인도 불가능했고 간신히 시신 숫자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전통문화로 봤을 때, 조상시신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전쟁이 끝난 지 43년째가 되는 지금도 베트남에서는 유족들이 가족 시신을 찾고 있다. 각종 첨단 탐지기를 동원하거나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시신을 찾는 데 무당까지 동원할 정도다. 영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시신을 찾고 있다. 그런데 쭈옹딘 폭탄 구덩이에서 죽은 사람들은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마을사람들에게는 자장가로 불릴 정도로 한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 베트남 정부의 정확한 통계가 있나.

▲ 앞에 말한 보고서는 1980년 초중반 보고서였고, 그 외에 직접적으로 다른 문건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민간인학살 실태 조사를 북베트남민주공화국정부(북 월맹)가 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이미 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가 1966년이다. 위원장이 보건부장관이었고, 위원들도 대부분 장관급 인사들로 구성됐다. 국가차원에서 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문서들이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공식적인 자료입수가 어렵고 정확한 통계를 확인할 길도 없다.

 

- 그렇다면 아직도 정확한 자료가 없다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어느 정도인가.

▲ 앞서 말한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문건에서는 ‘불완전하고 미완의 통계’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한국군 학살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수를 약 5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 초반까지도 베트남에서 민간인학살에 대한 전수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2000년대 들어서도 새로운 문건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2000년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저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약 80여 건의 학살사건이 일어나 9000명 정도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집계한 수치일 뿐이다. 공식적인 것은 1973년 파리평화협정 체결 당시 베트남임시혁명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낸 응우옌티빈 여사가 협상과정 중에서 한 한국군 관련 발언들이 있다. 한 예로 ‘한국군에 의해서 약 3000여 건의 민간인학살이 있었다’거나 ‘꽝남성 같은 한 특정지역에서 단 하루사이에 70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됐다’고 말한 부분이다. 빈 여사는 어떤 근거로 회담석상에서 그런 발언을 했을까. 나중에 알았지만 1966년 전쟁범죄조사위원회가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자료는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알려지지 않은 학살 사건도 많을 것 같다.

▲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따이한’이라 불린 한국군은 1964~1973년까지 8년에 걸쳐 32만 명이 베트남에 갔다. 한국군은 1170차례 작전과 55만여 회의 단위작전을 펼쳐 4만여 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한국군 사망자는 약 5000명이다. 이외에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은 민간인학살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학살이 더 있을 가능성도 많다. 베트남 당국은 ‘아직 불완전한 통계’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주민을 5000여 명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학살현장에 있던 주민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어떤 마을은 베트남 정부가 발표한 것의 몇 배를 넘는다.

 

- 시간이 많이 흘러 학살증거 확보가 어렵지 않을까.

▲ 학살은 주민들을 소개(疏槪)하는 과정에서 주로 일어난다. 소개된 예전의 마을은 지금 가도 찾기 어렵다. 마을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린 곳도 많다. 그나마 발굴된 자료는 생존자가 있거나, 전쟁 중에도 다행히 마을이 유지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경우다. 베트남에서 그런 식으로 마을이 사라진 것을 많이 봤다. 가보면 마을위령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곳이 과거에 학살지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어떤 마을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어린애였는데, 그마저 먼 친척집으로 가버려 증거도 없이 유령마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전쟁 통에 사라진 마을을 찾는다면 아마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이런 학살사건들이 어디엔가 남아 있을 여지가 아직도 많다.

 

- 제보도 들어오나.

▲ 최근에는 학살제보 연락이 자주 온다. 하지만 확실한 제보와 증거자료가 있다 해도 섣불리 마을에 들어가 일일이 확인하기가 두렵다. 피해사실을 확인하고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활동초기에는 어디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단서만 주어져도 길을 물어서 마을현장을 찾아가 확인까지 했다. 학살문제는 어느 한 개인이나 민간단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다. 재단에서 장학사업도 하고 위령제 때 조화를 보내기도 하고, 최대한 할 수 있는 선에서 고통과 아픔을 나누려 하지만, 그 많은 학살문제들을 해결하기는 사실 역부족이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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