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나절, 아버지는 아궁이에 군불을 땠다
저녁나절, 아버지는 아궁이에 군불을 땠다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8.12.0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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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록 에세이] 겨울 추억을 찾아서

 

내 어릴 적의 겨울은 다음 몇 가지 기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썰매타기, 연날리기, 눈사람 만들기, 군불 때기, 벙어리장갑에 방울 모자를 눌러 쓰고 산토끼를 쫓던 일, 아랫목에 누워 동화책 읽기, 질화로에 군고구마 구워 먹기 등이 그것들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세월의 더께는 나의 유년 시절을 놀라울 정도로 복원하고 있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즈음, 나의 뇌리에서 유독 떠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온돌방에 얽힌 추억이다. 저녁나절, 아버지는 아궁이에 군불을 땠다. 가으내 뒷산에서 거둬들인 솔가지와 마른 솔잎 한줌을 아궁이에 넣고 성냥을 당기면 매운 연기와 함께 탁, 탁 불길이 피어올랐다.

시커먼 구들 골을 타고 들어간 열기는 안방과 건넌방을 가로질러 곧바로 굴뚝으로 빠져나갔다. 흙과 돌로 지은 집이다 보니 쥐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매캐한 연기가 솟아오르기 일쑤였다. 그러노라면 집 안팎이 온통 매운 연기로 가득 차서 눈물이 질금거렸다. 바람이 불면 연기가 흩어져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눅눅한 날에는 눈, 코로 달려드는 연기를 피해 다니느라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군불을 때고 나면 온돌방이 서서히 달아올랐는데, 뜨끈한 아랫목에 누우면 차가운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면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세 번 군불을 지폈다. 저녁에는 화력이 오래가는 생나무나 장작을 충분히 때야 했다. 그래야만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온돌방을 달군 열기는 이른 아침까지 남아 있게 마련이었다. 군불을 지피고 난 다음 타고 남은 불씨를 질화로에 옮겨 담는 일은 내 몫이었다.

집집마다 헛간에는 장작이며 솔가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곤 했다. 밥을 짓거나 소여물을 끓일 때 아주 요긴하게 쓰인 게 땔나무였다. 그 시절의 겨울나기는 땔나무와 아궁이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질화로엔 언제나 한 쌍의 부젓가락 혹은 인두가 꽂혀 있었다. 부젓가락은 불씨를 헤치거나 간혹 떡을 구울 때 요긴하게 쓰였다. 부젓가락 두 개를 적당한 간격으로 벌리고 그 위에다 인절미나 절편을 올려놓고 구우면 그 구수한 냄새에 정말이지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세모꼴 모양의 인두로는 밤이나 고구마를 묻어 굽기도 하고, 옷 팔소매를 다려 꺾거나 저고리 앞 동정을 여미기도 하였다. 후자는 언제나 어머니가 떠맡았다. 인두질로 쭈글쭈글한 옷을 반듯하게 펴는 일은 어머니의 특기였다. 놋다리미가 있었지만 다리미가 닿지 못하는 부분은 인두질이 그만이었다. 어머니의 옷 다루는 솜씨는 동네에서도 알아줄 정도였다.

‘부어엉, 부어엉….’ 밤이 깊으면 집 앞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우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지만 따뜻한 화로와 아버지의 구수한 옛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두려움이 싹 가셨다. 몇 초 간격으로 이어지던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장가 소리처럼 들렸다. 동생은 그 소리가 무서워 얼른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는데,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아버지는 겨울밤 늦게까지 으스스한 귀신 얘기를 들려주셨다. 긴긴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화로 가에 둘러앉아 듣는 옛날이야기는 재밌고 무섭고 때론 슬펐지만 문풍지를 울리는 솔바람소리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우우 하는 그 소리는 새벽녘까지 계속되다 먼동이 트면서 잦아들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여운이 감동처럼 남아 있다.

질화로의 불씨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남아있었다. 다 타고 남은 재를 헤치면 그 속에 벌건 불씨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른 아침, 어머니는 푸석푸석한 재를 퍼내고 아궁이에서 막 끄집어낸 시뻘건 불덩이를 화로에 새로 담았다. 불을 담고 그 즉시 양미리나 고등어를 굽거나 된장국 그릇을 올려놓으셨다. 지글지글 생선 익어가는 냄새와 그 옆에서 폴폴 끓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라니. 그런 날 아침밥은 두 그릇을 비울 만큼 입맛이 돌았다.

겨울 한철 화롯불 없이 지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우선 추위를 물리칠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다 화롯불이 없는 날에는 온종일 추위에 떨어야 했다.

 

온갖 난방 제품들이 넘쳐나는 지금, 고향집의 화롯불이 마냥 그리워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아무리 편리하고 성능 좋은 난방기가 놓여 있어도 고향집의 화롯불만 못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문명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고 사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실감이 안 날 테지만 나이 지긋한 마흔 살 안팎의 중년 세대들에게 화롯불은 추억의 한 상징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시절 겨울, 내가 즐겨 놀던 놀이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연날리기다. 창호지에 대나무살을 다듬어 만든 연을 들고 뒷동산으로 논밭으로 뛰어다니며 띄워 올리던 추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연날리기는 초겨울에 시작하여 이듬해 추위가 가시기 전까지 이어졌다.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창공에서 곡예하듯 묘기를 부리는 연싸움은 스릴 그 자체였다.

연은 생긴 모양이나 표면에 붙이는 색종이와 칠하는 빛깔에 따라 종류가 다양했다. 반달연, 방패연, 가오리연 등이 가장 흔했지만 이따금 봉황연, 용연, 접시연, 오색연, 나비연, 쌍나비연, 제비연, 호랑이연, 박쥐연 등도 볼 수 있었다. 한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 방패연은 구조가 간단해 어린 우리들이 쉽게 띄울 수 있었지만 가오리연은 만드는 과정이 매우 복잡해서 세심하게 다루지 않으면 금세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어쩌다 봉황처럼 생긴 봉황연도 볼 수 있었는데 하늘을 호령하듯 힘차게 날아오르던 모습이 두 눈에 생생하다.

얼레로 연실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한 나로서는 연을 높이 띄울 수가 없어 매번 친구의 도움을 구해야 했다. 친구는 예의 그 민첩한 동작으로 연을 자유자재로 다뤘는데 꽤 먼 거리를 급강하시켰다가 다시 머리를 쳐들고 올라가게 하는 묘기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상승과 하강, 좌우로 빙빙 돌기, 급상승과 급강하, 전진과 후진 등 갖은 묘기를 보노라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연놀이는 이렇게 긴장감과 함께 스릴을 맛보게 해주었다.

 

눈이 소복이 내린 날 아침,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을 끼고 잿빛 토끼털 귀마개에 허벅지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또래들과 함께 집 뒷산으로 토끼몰이에 나섰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토끼 사냥은 겨울철 가장 신나는 놀이였지만 약삭빠른 토끼를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린 우리보다 서너 살 위인 동네 청년들은 어떻게 잡았는지 산에 올라갔다 하면 어깨에 토끼를 한 마리씩 메고 왔지만 우리들은 매번 허탕을 쳐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토끼란 놈은 뒷다리가 길어 아래쪽으로는 잘 뛸 수가 없다. 그래서 아래에서 위로 몰아가는 것보다 위에서 아래쪽으로 몰아야 잡을 확률이 컸다. 청년들은 이런 방법을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가 다니는 길목을 잘 아는 아랫집 아저씨는 올가미를 쳐 잘도 잡아 왔다. 집 근처에 자주 나타나는 꿩도 사냥감으로 그만이었다. 하지만 꿩 또한 토끼만큼이나 예민하고 민첩해서 손으로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어른들은 엽총으로 꿩을 잡았다. 엽총이 없는 마을 어른들은 흰콩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싸이나(푸른색 독약)를 넣은 다음 밭둑 같은 곳에 뿌려두고 주워 먹길 기다렸다. 콩을 주워 먹은 꿩은 얼마 못 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픽픽 쓰러져 죽었다. 지금 같으면 불법으로 처벌을 받았겠지만 그 당시엔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졌다.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타던 추억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매해 겨울 내가 앉을 만한 크기의 판자 밑에 각목을 나란히 붙이고 쇠줄을 박아 썰매를 만들어 주셨다. 썰매 위에 앉아 송곳으로 양쪽의 얼음을 찍어가며 씽씽 달려가노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또래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며 까르륵대다보면 한나절이 금방 지나갔다. 실수로 넘어지기도 하고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논둑에 부딪치기도 하고, 아무튼 어릴 적 얼음썰매는 없어서는 안 될 겨울 필수품이었다. 팽이 돌리기도 썰매타기만큼이나 재미있었다. 얼음판 위에 팽이를 돌리고 쓰러지지 않게 팽이채로 매질을 하던 기억. 팽이가 한참 잘도 돌아가다 힘이 빠져 비실비실 쓰러질 찰라, 다시 힘껏 매질이 시작되고 또 다시 비실거리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재미도 재미지만 짜릿한 전율마저 느껴졌다.

겨울은 그렇게 깊어갔고 이제 내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들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때 그 겨울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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