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향이란 역시 보물창고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고향이란 박물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박물관 중에서도 전시할 공간을 미처 확보하지 못한, 저 아래 지하 수장고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미공개 희귀물이 도대체 몇 점이나 되는지 상상조차 해볼 수 없는 그런 거대한 박물관이다.

국화축제가 끝난 뒤의 내 고향 매산을 다시 가 보았다. 시들어가는 국화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누구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내 생각이 그냥,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이 고향 마을의 이런저런 풍경들을 떠올리고 있었고, 한 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운전을 하는 내 손이 핸들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들어가는 국화
시들어가는 국화

고인돌 박물관 앞에서 주차장을 오른쪽에 끼고 길게 돌아서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아는 얼굴이 보였다. 나는 차를 세워놓고 반갑게 달려가서 인사를 했지만, 그는 “어, 왔는가”하고는 기분 망쳤다는 듯이 싹 외면해 버린다. 내 마음의 반가움도 당연히 싸늘해져 갔다.

그를 발견하고 달려가는 순간의 내 마음은 그가 친숙한 고향 사람이었지만, 싸늘하게 식어버린 뒤의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는 뭐랄까, 원수라고까지 말할 수야 없겠지만 그 비슷한 무엇일 뿐이었고, “어, 왔는가”하고 말한 그의 간단한 코멘트 또한 ‘자네 아직도 살아 있는가?’로 들렸다.

사실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얼굴을 마주하면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일이 년의 역사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그의 모친이 작고했을 때, 문상을 간 나에게 그가 한 말은 “자네도 왔는가”였다. 그리고 한참 뒤에 한다는 말이 “자네 안 바쁜가? 얼른 가 보소”였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나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잊어버린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반응에 소스라쳐 놀란다. 그렇다고 왜냐고, 왜 나를 도둑놈 대하듯이 하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으니, 내 가슴은 그저 답답하게 앙금처럼 가라앉아 갈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는 나에 대한 감정을 전혀 모르는가?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않다.

그와 나는 아래윗집에 살았었다. 우리 집이 위에 있고 그의 집이 아래쪽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장과 목수 일에 소질이 있어서 관련된 연장이 많았다. 우리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다가 연장이 필요하면 나를 불러 아랫집에 가서 좀 빌려오라는 말씀을 무시로 하시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제사 같은 것을 모시고 나면 떡이며 이런저런 고기를 우리 집에 보내 오셨고, 우리 어머니 또한 제사 같은 것을 모시고 나면 떡이라든가 이런저런 고기 같은 것을 그 집으로 보내곤 하셨다.

 

겉보리이삭
겉보리 이삭

그는 아들 넷에 딸 하나인 집의 장남이었고, 나는 아들 다섯에 딸이 하나인 집의 장남이었다. 그는 여동생과 나이 차가 십몇 년인가 많았고, 그 여동생은 나보다 두 살인가 세 살이 아래였다.

그녀는 소리 내어 웃기를 잘하고, 놀랍거나 감격스런 일을 접했을 경우 괴성을 지를 줄은 알아도 말은 할 줄 몰랐다. 뭔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을 때 그녀는 손짓과 발짓 그리고 얼굴 표정을 활용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그녀와 무슨 얘기를 나누고자 할 때 그녀와 똑같이 손짓과 발짓 그리고 얼굴의 표정 변화를 활용하는 이른바 수화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내 나이 아마 열여섯인가 열일곱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서울에서 잠시 내려와 있었다. 보리밭에 보리 이삭이 나올 무렵이었고, 외양간의 소들이 밖으로 코를 내밀고 킁킁거리며 자주 소리를 지를 무렵이기도 했다. 바싹 마른 여물이나 씹고 있는 콧속으로 향긋한 풀 냄새가 맡아지니 소들은 애가 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 작은 소 한 마리가 있었다. 아랫집에는 쟁기질이 전문인 매우 큰 황소가 있었다. 우리 집의 작은 소는 내 여동생이 가끔 어린 풀을 베어다 간식으로 주고 있었고, 아랫집의 큰 황소는 수화가 아니면 말이 안 통하는 그녀가 매일 꼴을 베어다가 특식으로 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 집을 찾은 나는 반은 재미 삼아서, 반은 장남으로서의 의무감으로 꼴 베기라고 하는 그 성가신 임무를 맡고 나섰다. 장소는 보리밭이었다. 보리 이삭이 팰 무렵의 보리밭에는 풀이 많다. 밭두렁에는 낫으로 벨만한 풀이 아직 없지만, 보리밭에는 보리가 잘 자라라고 거름을 주기 때문에, 밭 메기를 아무리 잘했다 해도 보리밭 고랑 사이에는 풀이 제법 있기 마련이었다.

 

보리이삭
보리 이삭

꼴 베기는 대개 오후 서너 시부터 시작되었다. 세 시 즈음이면 아랫집의 그녀가 어깨에 구럭을 메고, 손에는 낫을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 앙앙거리며 기어 다니는 내 동생들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내 여동생과 아랫집의 그녀가 어린 동생들을 쳐다보며 키득거리고 있는 동안 나는 낫을 갈고, 지게를 지고 나서면 그녀가 내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하기로 무슨 약속 같은 것을 한 것도 아니련만, 자연스럽게 그런 구도가 형성돼 있었다.

그날도 거의 그런 방식으로 그녀와 나는 우리 집을 나와서 남의 보리밭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쪽 고랑에서, 나는 한참 떨어진 저쪽 고랑에서 앉은걸음으로 기어 다니다시피 하며 풀베기를 한참이나 하고 있던 어느 순간 끄아악이라고나 할까 으아아악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엄청난 옥타브의 비명 소리가 나를 소스라쳐 놀라게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을 때, 아랫집의 그녀가 낫을 손에 든 채로 마구 휘둘러대며 보리밭을 갈팡질팡 가로질러 아무 데로나 막 뛰어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냐 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그때 오십여 미터쯤 저쪽 밭에서 풀 메기를 하던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뛰어 달아나는 그녀를 보다가, 나를 보다가,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방식의 구경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그 뒤로 이삼 분쯤 지난 뒤에 나는 아랫집의 그녀가 왜 그렇게도 벌에 쏘인 강아지처럼 정신없이 달아나야만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달아나면서 버려둔 구럭을 챙겨서 갖다 주겠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갔을 때, 길이가 족히 일 미터는 넘어 보이는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튼 채로 혀를 날름거리며 너는 또 누구냐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고, 순식간에 정나미가 떨어진 나는 구럭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채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을 공동우물로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러 나갔던 나는 마을 사람들이 보내는 심상찮은 시선을 의식해야만 했다. 만나면 수복아 어쩌고 하며 살갑게 대하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심지어는 ‘수복이 총각’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만들어서 불러대던, 시집온 지 삼 년차 미만의 새각시들까지도 나 보기를 마치 천하에 몹쓸 사기꾼이라도 대하듯이 이죽거리는 눈초리로 힐끔거리기나 할 뿐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뭐라고 귓속말이나 주고받고 있는데 그것 참,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를 몰라도 한참이나 몰랐던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고, 숫기가 없는 탓으로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냐는 따위 질문 한 마디 던지지 못한 채로 어영부영 돌아오고 말았다.

 

그 시절의 황소는 아니지만
그 시절의 황소는 아니지만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지 않았고, 말도 붙여주지도 않았다. 내가 뭐라고 말을 붙이면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고, 대꾸를 한다 해도 그런 소리를 왜 하느냐는 식의 핀잔이나 줄 뿐이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미쳐버린 것 같았다. 세상의 중요한 뭔가가 하루아침에 뒤집어져버린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아랫집의 그녀마저도 그날 이후로는 볼 수가 없었다. 꼴 베기는 그녀의 큰오빠가 하고 있었고, 그 남자 또한 나 보기를 괴물 대하듯이 해서 말 한 마디 붙여볼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뭔 사건이냐 응? 내가 나 자신에게 묻기를 얼마나 했는지,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의아해 하며 괴로워하기는 또 얼마나 했는지, 스스로의 행위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기를 수도 없이 했건만 끝내 답을 얻지는 못한 채 서울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를 맞이하고 말았다.

어렴풋이나마 그 사건의 개요를 짐작하게 된 것은 내 나이 스무 살을 훨씬 넘어서였다. 무엇이 계기가 되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어느 하루 갑자기, 벼락처럼 그런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

그날 보리밭에서 내가 말 못하는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었다고, 풀 메기를 하던 아주머니가 그런 소문을 냈고, 마을 사람들은 그 소문을 참으로 믿고 나를 그렇게도 경원시 했구나 하는 생각.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까? 아니었다. 때가 늦어도 너무 늦어 있었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나에게 대놓고 그런 얘기를 해준 사람도 없었다. 그런 얘기를 나한테 직접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그날 보리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상세하게 얘기해줄 수 있을 테지만, 누구 한 사람도 구체적으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그게 아니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게
지게

그랬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나를 보면 외면했고, 나중에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고, 그리고 서서히 잊어 갔다.

마을 사람들은 잊어 갔지만, 그녀의 오빠들은 잊지 않았다. 나를 만나면 터무니없이 무례한 소리로 나를 무안하게 하는 것이니, 그날 보리밭에서의 사건을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고, 절대로 잊지 않겠노라 맹세까지 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그날 보리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구렁이 한 마리가 말 못하는 소녀를 기절초풍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내가 있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사람이 둔한 탓으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순발력 좋게 파악하지 못한 죄를 나에게 묻는다면, 그것도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할까?

세월이 흘러도 겁나게 흘러버린 지금, 나는 그 사건이 그렇게도 의미심장할 수가 없고, 그래서 어떤 때는 슬그머니 미소를 짓기도 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싶어서다. 고향이란 이렇게도,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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