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지진은 나의 배낭에서 시작되었다

엑스레이 앞에서 흔들리는 표정으로

숨을 들이마실 때

나도 좀 스마일

솜사탕은 달고 금방 사라지지

새것을 먼저 갖고 하얗게 무르익는 나는 너의 형

나의 생일에도 그랬고 너의 생일 때도 그럴 거야

하얀색만 두고 알록달록을 해체하는 것도 재미있게

옷장 속에 레고를 두고 오듯

비탈길 아래로 나의 마을을 버린다

집을 떠나며

내가 챙겨 온 짐

동생아 그만 태어나

 

성동혁, <라일락>, 《6》

 

사진=pixabay.com

가장 젊은 감각, 가장 새로우면서도 낯설지 않은 감각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염원일지도 모르겠다. 성동혁 시인은 그런 염원에 부응하는, 가장 감각적이고 젊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피부로 이루어져있다. 연과 연이 산산이 부서진 상태로 끌고 가는 맥락은 글이 갖는 법칙이나 이론으로 설명될 수가 없다. 오직 시인이 가지고 있는 피부와 그 피부에 맞닿는 온도 혹은 촉감, 그리고 이를 모두 아우르는 비상식적 감각 속에서 시는 시작과 끝을 만들어낸다. 불규칙적인 시론을 통해 감각의 질서를 그려낸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성동혁만의 맥락은 독특함을 넘어선 일종의 혁신과도 같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시가 감각의 제국 속에서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한껏 복잡하고 모호한 말들로 시인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으나, 실은 그 노력이 별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성동혁 시인이 가져다주는 흐름과 시대적 의제가 가볍게 다루어질 수만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만 무게감 있는 단어들을 적어보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러한 무게들로 그를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무게는 그의 시가 갖는 독특한 이미지들을 손상시킨다. 일상 속에서 만들어지면서도 서로 연관이 없는 단어들이 부딪치며 낯선 분위기를 만드는 하나의 메커니즘은 시인이 일상이라는 거대한 관념을 가볍게 다루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결국 성동혁의 시가 갖는 흐름이나 의제는 시의 뒤편에 서있는 것에 불과할 뿐, 우리는 시인이 만드는 순간순간적인 시선과 그에 따르는 감정들을 읽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시의 초입부터 심상치 않다. ‘나의 배낭에서 시작된 지진’이라니. 배낭은 지극히 사적인 시인만의 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오직 시인만이 짊어 멜 수 있는 짐이니, 그로부터 시작된 지진은 오롯이 시인만의 것이기도 하다.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고 거대한 힘과 힘이 무언의 이유로 서로 부딪치는 현상 속에서 시가 비로소 시작되니, 시를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결국엔 그 시작과 끝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결말을 드러내놓는 셈이다. 그토록 사적이고 불명확한 세계관 속에서 그의 시는 차근차근 감각을 더듬어 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나타나는 엑스레이는 앞선 연과 별다른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엑스레이를 찍기 직전 ‘흔들리는 표정’과 호흡의 불안정함은 오히려 지진이라는 시작점을 보충해주고 있다. 결국 배낭에서 시작된 지진이란 다시 말하자면, ‘나의 피부에서 시작된 지진’과도 같다. 온몸에서 두드러지는 전율과 흔들림이 시인의 배낭 속에서부터 퍼져 나온다. 그는 왜 지진이 있는 배낭을 감당해야 했을까. 왜 그는 흔들려가면서 엑스레이 앞에 서야 했을까.

미소도 아닌, ‘스마일’을 지을 때부터 우리는 충실히 시인의 감각을 따라 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논리 혹은 합당하고 합리적인 인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솜사탕도 그렇고, 갑작스럽게 형과 동생의 구조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생일과 레고, 비탈길과 마을도 그렇다. 시인이 나열하는 모든 것들은 산산이 조각나 있다. 만약 그것들이 기억이라면 시간 순으로든 인과 순으로든 그 순서를 정해 나열해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성동혁의 세계로부터 튀어나온 것들은 그런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모든 말들이 감각에 의해 습득된 것이며, 감각으로부터 표출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기억보다는 당연한 듯 살았던, 그래서 감각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인 것이다. 삶인 것이다. 그래서 더 괴롭고 무거운 것들임에도, 시는 가볍게 흩날리는 순간들을 그저 접붙임으로써 삶의 무게를 알아서 유추하게끔 만든다. 형과 동생이라는 아주 사적인 관계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형은 왜 집을 떠나고 동생이 그만 태어나길 바라는지,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 속에서 형의 단호한 바람은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에게 태어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감각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은 이미 살아가고 있는 동생에게 말하고 있다. 태어나지 말라고. 이는 원망이나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테다. 태어남을 이미 겪은 동생이 다시 그것을 겪게 될 때, 형은 가까스로 그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감각적인 순간일 수도 있겠다. 이성적으로는 화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수 있지만, 그 단호함과 자괴감 사이에서 감각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확실한 것은 오직 이뿐인 것이다. 흔들리는 표정과 지진, 그리고 배낭. 지극히 사적인 말 한 마디로 시인은 그 좁디좁은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마저 닫는다.

어떤 위로 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시를 읽는 일은 어리석다. 시가 단순한 잠언의 단계를 벗어난 지는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의 시는 더 나아가 드넓고 불명확한 세계를 체험해보고 싶어 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성이 있고 성동혁 시인은 그 방향으로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사람이다. 누군가 보기엔 시인의 모습이 참 불안하고 안타까울 수도 있겠지만, 시인과 시는 원래 모두 그렇다. 그들이 불안하지 않다면 대체 누가 흔들릴 수 있을까. 고집스럽게 성동혁의 시를 읽어본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