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없는 남자 소범수입니다”
“속이 없는 남자 소범수입니다”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9.01.1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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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선운산의 거북바위가 정원석처럼
선운산의 거북바위가 정원석처럼

문득 고개를 들면 선운산의 저 유명한 거북바위, 먼 옛날에 배를 묶었던 바위라 해서 배멘바위라 부르기도 하는 육중한 바위가 그림처럼 아스라이 보이는 그 집을 나는 소굴이라고 부른다. 무슨 소굴인지는 나도 모른다. 산적이나 화적들의 소굴은 분명 아니다. 양아치 소굴도 당연히 아니다.

잠자리며 나비 같은 곤충 표본이 있는가 하면 비너스처럼 미끈한 수석이 있고, 과일 효소를 숙성시키는 작은 시설이 있는가 하면 장수하늘소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상자가 있고, 서울에서 어머니가 보살피던 것을 가져왔다고 하는 각종 화분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고, 개량한복이 걸렸는가 하면 예비군 복이 줄줄이 걸려 있으며, 액자에 고이 모신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심지어는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까지 벽에 걸려 있고, 뭐라는 것인지 알 수도 없는 트로피와 상패와 수료증 따위들이 그야말로 어지럽게 여기저기 도처에 박혀 있는 그런 ‘집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내 입에서 홀연 그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야아, 이 소굴 참 재미있네요. 잉?”

그러자 주인은 킬킬 웃어대며, 자기도 그 표현이 재미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입으로 소굴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다. 주인 자신이 붙여놓은 명칭은 ‘타잔의 숲’이었다. 내가 그를 알고 찾아간 이유도 사실은 타잔의 숲 때문이었다. 타잔의 숲이라니,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이 소굴은 산속에 처박혀 있다. 소나무가 많아서 이름이 솔뫼이고, 부르기는 솔뫼골이라고 한다. 아름드리 적송이 조각 작품처럼 늘어서 있는 이 골짜기에 주인은 자기만의 소굴을 앉혔다. 컨테이너 한 대를 중심으로 좌우를 늘려 창을 내고, 앞도 늘려서 창을 낸 다음 위로도 사람 키보다 높게 늘려서 지붕을 얹었으니, 명색 2층 집을 지은 셈이다.

 

소범수씨의 소굴
소범수씨의 소굴
소굴 내부
소굴 내부

멀리서 보면 무슨 창고 같기도 하고, 나락이나 보리 같은 것을 기계로 말리는 건조장 같기도 하고, 현대식 방앗간 같은가 하면 조각이나 설치미술 같은 것을 전공한 예술가의 창작공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소굴에서 주인은 무엇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두꺼비처럼 눈이나 끔뻑거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일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하는지 자기 자신도 모를 정도로 바빠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속이 없는 남자 소범수입니다”하고는 껄껄 웃고 있었다. 암세포를 잘라내느라 수술을 할 당시 내부 장기의 상당부분을 적출했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서울 사람이었을 당시 그는 보석세공이라는 퍽이나 예민하고 깔끔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봐도 아름다운 귀족 같은 여인의 손과 귀와 목을 더욱 아름답게, 품격도 높게 꾸며주는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같은 것들을 다루던 손으로 황토를 만지고 송진내 가득한 소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닐 줄은 소범수씨 자신도 아마 예전에는 몰랐을 것이다.

하긴 자신의 미래를 명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알 수는 없다 해도 예감은 있기 마련이다. 예감이란 달밤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흐릿하고 모호해서 갈증을 낳기도 하지만 설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서 갈증과 설렘은 자기개발의 양대 축이다. 갈증이 없다면 새로운 뭔가를 찾고자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설렘이 없다면 꿈을 꿀 수가 없으니 인생은 무료해지기 십상이다.

어쨌든 그는 도시에서 시쳇말로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반짝이는 구두에 반듯한 넥타이 차림으로 와인이나 칵테일을 홀짝이는 신사였다. 이웃과의 사이도 좋았고, 동료들과의 정리도 도타웠다. 다정다애한 어머니가 아들의 앞날을 위해 늘 기도해 주셨고, 품위 있게 우아한 아내가 남편의 매무새를 정성껏 잡아 주었으며, 보기만 해도, 그 목소리만 들어도 사랑이 절로 샘솟는 아들과 딸의 참신한 언어가 아빠의 보무를 당당하게 해 주었다.

 

고사리가 지천인 숲
고사리가 지천인 숲

그런데 이상했다. 세상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도 없건만, 그의 내부에서는 뭔가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이게 다인가? 이게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막연한 갈증은 날로 달로 더해져만 갔다.

어느 날 홀연 그림 하나가 떠올라 왔다. 토끼와 노루와 온갖 새들이 아름드리 소나무들 사이를 뛰거나 날고 있는 그림이었다. 거기 어디에 남자 하나가 있었다. 남자는 벌거벗고 있었고, 칡넝쿨 같은 것을 타고 다니며 온갖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 낯설지 않았다. 새롭지도 않았다. 그냥 친숙할 뿐이었다.

타잔이 되고 싶다. 타잔으로 살고 싶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갈증이면서, 설렘이기도 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었다. 불행도 행복도 아닌, 어중간한 도시생활을 타성적으로 견디던 어느 하루 그는 마침내 집을 나섰다. 어머니의 걱정과 아내의 염려가 바다와도 같이 넓고 깊었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을 나온 그는 솔뫼골 산속에서 고사리와 취나물과 두릅 같은 것들을 채취하는 한편 도라지와 작약 같은 것들을 심기 시작했다. 새롭게 약초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완전히 새로운 행복의 세계를 스스로 개척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는 암세포란 것이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아, 이것이었던가.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이란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바는 없었지만, 몸은 그 조짐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도 예전에는 행복하다고 여겼던 도시생활이 따분하고 뭔가 죽어간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몸이 몸 자신의 위험을 감지하고 도시에서는 안 된다고, 어서 빨리 도시를 탈출하라고 일렀던 셈이다.

 

이렇게 살고자
이렇게 살고자

어머니와 아내의 성화를 어찌할 수 없어서, 그는 일단 다시 도시로 가서 수술을 받기는 했지만, 정양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까지 귀에 담지는 못했다. 한 달이 채 안 돼서 그는 빚쟁이가 야반도주를 하듯이, 상사병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도시를 탈출해서 솔뫼골 숲으로 들어갔다. 한전에서 폐기처분한 전봇대를 가져다가 개울에 다리를 놓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말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는 자신의 예감을 믿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예감이라기보다 자신의 몸이 내려준 처방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나면 그 어떤 병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는 옛말처럼, 솔뫼골을 새로운 친구로 사귀게 된 그는 약초 공부를 하면서 익힌 지식으로 마를 심었고, 자기가 심은 마를 캐서 자기가 먹기 시작했다. 소화흡수가 대단히 좋은 것으로 알려진 마를 상복함으로써, 암세포로 인해 망가진 신체의 각 기관을 회생시킬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머니와 아내의 걱정은 나날이 높아져 갔지만, 그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결국은 판명되었다. 삼 년, 사 년, 오 년이 지났을 때 그의 건강은 거의 완벽하게 옛 모습을 찾았다. 건강에 자신을 얻은 그는 이제 마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늘 위태하게 휘청거리는, 날로 달로 건강이 망가져 가는 도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나눠주는 것은 아니었다.

입소문을 듣고 회가 동한 사람들의 주문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주문은 쇄도라는 말을 써야만 할 정도로 폭증해 갔다. 어떤 철없는 사람은 돈 자랑을 하자는 것인지 엄청난 양을 주문해 오기도 했다. 마를 대량으로 쌓아놓고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도시 사람 특유의 초조와 불안과 마음이 앞서는 까닭인 줄 잘 알기에 소범수씨는 그저 웃기나 할 따름이다.

 

마 수확하던 날
마 수확하던 날

마는 수분 함량이 팔십 퍼센트 이상이나 되는 매우 민감한 식물이다. 조금만 다쳐도 금방 상해서 먹을 수가 없게 되고, 일반 냉장고에 넣어두면 이내 말라서 마 특유의 효용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마를 수확할 때는 갓난아이 목욕을 시키듯이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하고, 보관에도 각별한 주의와 신경을 써야만 한다. 요즘은 저온창고가 일반화 돼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도 안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범수씨는 오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해 왔고, 마침내 성공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땅에서 캐낸 지 일 년이 지난 마도 어제 캐낸 것처럼 생생하게 풋내를 풍기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꿈은 마 장사가 아니다. 이른바 노하우를 십분 활용해서 마 장사를 하기로 하자면 돈이야 벌겠지만, 돈 냄새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유혹하지 못한다. 그를 유혹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고, 삶이었다.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즐겁되 자연스럽게, 가공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게, 돈이 없다고 내심 위축되는 반쪽짜리 즐거움이 아니라 마음껏 뛰어다니며 원도 한도 없이 하하하, 웃어댈 수 있는 그런 즐거움의 현장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금방 캐낸 마
금방 캐낸 마

잘 노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이다. 돈을 차떼기로 높이 쌓아놓은들, 그게 다 뭐란 말이냐. 웃자. 노래하자. 뛰자. 그렇다면 어떻게?

아름드리 소나무와 고사리와 취나물과 각종 새들과 동물들 그리고 쑥부쟁이 꽃이 피어나는 솔뫼골 전체를 하나의 놀이터로 보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산나물을 채취하든 어쩌든 하여튼 어른들의 방식으로 노는 동안 아이들은 아이들의 방식으로 놀게 하자는 것이었다.

토끼나 새 같은 동물을 쫓아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고, 덮어놓고 아무 데로나 마구 뛰어다니고 싶어 하는 아이들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하고, 줄타기 같은 놀이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를 타잔처럼 줄에 의지해서 훨훨 날아다니는, 그런 놀이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문명에 확 찌들어버린 어른들이야 어쩔 수 없이 노래방이다 뭐다 그런 문명에 찌든 방식으로 논다지만, 아이들이라도 가끔은 타잔처럼 야성적으로,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냥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시간을 갖게 하자는 것이다. 숲속에 작은 공연장을 지어서 음악이나 연극 같은 서정적인 시간에 빠져드는 프로그램도 당연히 있다.

무질서의 질서를 체득했다고 여겨지는 소범수씨의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문득 유행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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