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저 나무 좀 봐”
거대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 애가 말했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였다 무수히 뻗어 나온 가지와 잎들이 일대를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고 있었다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저렇게 큰 나무는 본 적이 없다 그 애의 팔이 자꾸 내 몸에 닿는 것이 신경 쓰인다

팔월의 열기도 나무의 어둠 아래로는 미치질 않았다

“이곳은 누가 선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럼 
캄캄한 것과 환한 것이 나뉘어 있구나”

그 애가 말할 때,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애로부터 멀어지려고 그랬다 나뭇잎이 이렇게 섬세하고 무엇인가 잔뜩 돋아나서 징그럽다는 것을 그전엔 왜 몰랐을까

오늘은 그 애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인데,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그 애는 말했는데, 그 애는 아무런 말도 해주질 않고
그 애는 어째서 나를 이 깊은 산속으로 데려왔을까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다

나의 마음은 기묘하게 뒤틀려 가고 있었으나 점차로 모든 것이 명료하였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구나

그러한 생각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나무 아래 완전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애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은 채였다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 애가 말했다

명료하게

미지근한 그 애의 체온이 내게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황인찬, <서정>, 《희지의 세계》

 

시는 정신의 산물인가에 대한 대답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정신이 어느 정도 시에 섞여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시는 그 어떤 문학 장르와도 달리 오로지 정신에 의해 정돈되거나 다듬어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문학 자체, 또는 예술 자체가 무엇의 산물인가에 대해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무엇으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문학과 예술에게 정신을 굳이 묻는 이유는 그것들이 정신과 육체의 경계 사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나름대로의 영역을 주장하고, 육체 역시 스스로의 영향을 굳건히 하는 가운데 그것들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갔다가 하는 식의 운동 또는 파장을 일으킨다. 시는 그런 운동과 파장의 크기가 매우 큰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정신과 육체를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고, 동시에 그 모두를 융합하는 과감한 시도가 허용되기도 한다. 그런 혼돈 속에서 누군가는 시에게 질서와 현실을 요구하고, 누군가는 낭만과 이상을 요구한다.

 

사진=pixabay.com
사진=pixabay.com

황인찬 시인은 시에게 요구되는 여러 주제 가운데 서정을 노래한다. 그가 시에게서 서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서정을 품지 않은 시란 찾아보기 어려우니까, 또 품지 않는다고 시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요구할만한 것 역시 아니다. 그런데 그의 서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정신일까, 아니면 육체일까. 생각에서 태어나는 것일까, 혹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것일까. 황인찬이 서정을 대하는 태도는 그의 시에서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서정이란 오랜 추억이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되새기며 나타나는 그의 서정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서정은 정신에서도, 또는 육체에서도 생겨나지 않은 것과 같다. 지금이라는 그의 시간이 갖는 정신과 육체는 결코 과거와 그 속의 추억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황인찬의 서정은 맥락이 만들어낸다. 그의 시 역시 감정과 논리를 제쳐두고 커다란 흐름을 좇고 있다. 시에서 가장 우선시되곤 하는 정신과 육체란, 황인찬에겐 맥락 속에서 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하다. 그의 시가 모두 맥락에 의존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황인찬 시인이 시를 쓰는데 있어 맥락과 이야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미 잘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시의 본질을 물론 흐리기도 한다. 소설의 것으로 주로 치부되는 이야기는 시의 자유분방한 영역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가 주는 긴장감을 늘어뜨리고, 순간순간 드러나는 시적 영감을 흩뜨리며 동시에 전개와 결말에만 주목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인찬의 이야기는 절대 순차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짧은 장면들이 접붙은 맥락 속에서 시인은 피어나는 서정의 속을 깊게 파고든다. 대화가 먼저 장면을 환기시키고, 뒤이어 나타나는 온갖 생각들과 감정, 그리고 외부에 대한 묘사들은 시 전체를 끌어가는 커다란 서정을 형성한다. 그 서정은 황인찬의 시 모두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의 시 모두는 그의 서정에 의해 정신과 육체, 또는 감정과 논리를 섞어나간다. 서정은 황인찬이라는 사람 자체의 축과 같다.

그렇다면 황인찬의 서정을 안다는 것은 곧, 황인찬이란 누구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답은 아주 명료하다. 그는 그다지 복잡한 이야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명확하게도 따뜻하며 부드러운 무언가를 따르고 있다. ‘내게로 전해져 오는 그 애의 미지근한 체온’ 역시 그 무언가의 운동을 가리키고 있다.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전해지며 움직이고, 동시에 그것은 미지근하다. 강렬하기보단 천천히 퍼져나가는 사랑, 그 사랑의 파장과 온도. 그의 서정이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황인찬이 누구라고 명확히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런 사랑에 가까이 있는 시와 시인임을 자연히 느낄 수 있다.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 따위의 클리셰에서 비롯되는 서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지독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만 황인찬의 따뜻한 품에 들어설 수 있다. 정신과 육체의 대립 위에서 시인이 내놓은 해결책은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아름답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