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쁘지 않지만, 예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예쁘지 않지만, 예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 김정원
  • 승인 2019.01.2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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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김정원 칼럼-페미&퀴어

1. 오늘은 여교역자회 총회가 있는 날이다. 모임의 성격을 고려하며 무엇을 입을지 고민한다. 학부 시절부터 노회 모임과 같이 경건을 가장해야 하는 곳에 참석할라치면 평소 입지도 않는 ‘딱정장’을 입어야 했는데, 그 본새가 몹시 간지러웠다. 그럼 입던 대로 하고 나가면 될 것을 머리에 꼭 꽃을 달고 갔었다.

본래도 경건한 복장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지만 꽃까지 달고 갈 것 뭐 있었나 싶다. 요샛말로는 ‘관종’이었나 보다. 변명하자면, 그 경건 일색의 분위기에 참여적이고 싶지 않았다. 타고난 반골기질이기도 하고, 나름의 저항이었다. 선배들의 꾸지람에도 개의치 않고 부단히 꽃을 달고 갔었는데, 이러한 기질은 목사가 되어도 채 수그러들지 않았는지 나는 ‘꽃까라’의 짧은 원피스를 입고 총회에 참석하였다.

 

사진=pixabay.com
사진=pixabay.com

여성들이 모인 공간은 유연함과 개방성을 가졌을까? 나의 짧은 원피스는 결국 회자되었고, 찬성과 반대로까지 나아갔다. 쓴 소리에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정숙한 모양새가 참 싫었다. 이성애자인 내가 타 여성 교역자들을 꼬셔먹기 위함도 아니요, 노출된 부위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다만 기독교적인 정숙함과는 상충되는 쾌락주의적 문화, 그 중 복식을 통해 그 사이에서 억압되고 갈등하는 나와 그들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내고 싶었다. 작전은 미약하게나마 성공하였다. 나의 원피스가 회자됨에 따라, 그 의도를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탈코르셋 운동은 “나는 예쁘지 않지만, 예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고백과 선언들을 이끌어냈다. 사회 속에서 남성들에게 바라봄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여성들을, 그 시선에 종 노릇하던 여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이 운동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페미니스트들은 노출과 은폐 사이에서 갈등한다. 머리를 썩둑 잘라내는 이들도 있지만, 이 운동을 지지하면서도 아침마다 화장을 하고, 여전히 브레지어를 착용하고, 제모를 하는 이들이 있다. 어깨와 다리를 노출하고 긴 머리를 스르르 넘기며 죄책감을 갖는 이들 역시 상당한 것이다.

탈코르셋을 주창하는 이들에게 ‘꽃까라 미니 원피스’는 나의 미약한 의도, 곧 저항의식에도 불구하고 먹혀 들어가지 못한다. 저항의 방식이 노출을 통한, 다시 말해 남성들의 바라봄의 대상에 걸 맞는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꽃까라원피스 뿐이랴. 내 일상의 복장 역시 여실이 남성들의 시선에 복역하고 있다. 더 솔직하게는 긴 머리칼을 자를 생각이 없고, 살 찌는 것을 염려하며, 이왕이면 남성들이 선호하는 바로 그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 나는 고퀄의 성적대상자가 참으로 되고 싶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성적대상화 자체를 심도 있게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실로 어깃장인 것이다. 다만,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선언 속에서의 예쁘지 않음은 누구의 기준으로부터 예쁘지 않음이었을까? 그 선언 속에 들어찬 빻은 미의 기준은 어쩐단 말인가.


3. 그저 나는 억압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노출과 은폐가 만들어내는 비정숙함과 정숙함 사이에서 갈등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페미니스트와 흉자(흉내자지 혹은 명예남성) 사이에서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방황과 긴장이 싫음이다. 인간의 기본 단위가 몸이라 할 때, 나는 이 몸뚱이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해내고 싶을 뿐이다.

나이브한 생각이라고 누군가 내게 꾸지람 하거들랑, 옷 입는 행위란 결국에는 더 나은 신체에 대한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고 되받아칠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좋아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남성들과는 상관 없는 신체 즉, 시대가 만들어 놓은 미의 덫에서 벗어났다고 한들, 우리는 결국 탈코르셋에 합당한 의복으로 우리를 ‘치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탈코르셋 아래 만들어진 자신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화장품을 집어 던지고, girls can do anything에 걸 맞는 씩씩한 옷으로 갈이 입었다고 한들, 결국 하나의 이념 안에서의 또 다른 자기 억압, 혹은 자기 대상화일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무의식적 순응(성적 대상화)에서 벗어나 의식적 억압(자기 대상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나같이 어줍잖은 페미니스트, 흉자적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비연애를 선언해가며 머리를 자른 여성들을 싸잡아서 탈코르셋 운동 아래 억압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4. 자신의 신체와 외모에 대한 집착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미적 기준을 만들어왔고 미적 기준의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억압해 왔다. 인간은 생존과 부(富), 권력, 그룹에의 귀속, 그리고 자신의 개성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의식적·무의식적 혹은 의지적 활동으로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다(정기성). 나는 어떤 그룹으로 귀속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대체 어떤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길래?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이러나 저러나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다. 경건에 알맞은 모양새로 스스로를 억압하다가, 예쁜 여성이 되고 싶어 스스로를 다시 억압한다. 남성의 응시를 욕망하는 것이 부끄러워 분연히 탈코르셋을 욕망하던 중 결국 이중적 욕망으로 인해 분열하며 또 한 번 나를 억압한다. 나의 의지를 갖고 스스로를 억압하게 되는 이 말도 안 되는 굴레를 나는 어찌 벗어날 수 있을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격일지도 모른다. 좀 쉽게 가면 될 것을 굳이 절룩거리며 갈 필요 뭐 있겠냐만은, 나는 격양되는 것이 싫다. 그 경건에 격양되고 싶지도 않고, 그 탈코르셋에 격양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세차게 흔들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의 아이러니는 필경 나 역시 ‘격양되고 싶지 않음’에 세차게 격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부정(否定)을 존재방식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렇게 할 때라야만이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듯한 안도감을 갖기 때문이다. 복식 즉 모양새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속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내겐 페미니즘보다 약간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페미니즘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하기에 나오는 고백이겠다.
 

5. 노출을 부추겨 온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나는 얼마나, 또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을까? 이성애자인 내가 그들에게 성적 대상으로서 그럴싸하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 인정되고 얼마만큼 배격 당하게 될까? 나는 경건의 모양 바깥에서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을까? 나는 탈율법적 모양새를 ‘꽃까라 미니원피스’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탈코르셋은 우리 여성을 진정 구원해내올 수 있는가? 그 운동에 풍덩 빠져들게 되면, 우리는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여성들의 코르셋 해방선언은 그들의 미적 인식에 해방을 안겨줄 수 있을까? 예쁜 여성과 의식 있는 여성 사이에서의 방황은 유의미한 것일까? 나는 결국 ‘꽃까라미니원피스’로 나를 억압하고, 탈코르셋으로 다른 방식으로 다시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이런 물음들은 차이를 위한 것일까, 연합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인 것인가? 혹 무리 밖에 있음에서 오는 불안감에 기인한 것인가?

우리는 결국 종교나 자유 혹은 페미니즘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를 재포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출처: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006?category=604721 [웹진 <제3시대>]

<김정원 목사는 한신대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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