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잎을 버리지 않으면 열매 맺을 수 없듯 이제야 갈 길 찾아”
“꽃이 잎을 버리지 않으면 열매 맺을 수 없듯 이제야 갈 길 찾아”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19.01.2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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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신기남 전 의원-3회

<2회에서 이어집니다.>

신기남 전 의원
신기남 전 의원

- 하지만 우리는 해양을 잃었다.

▲ 고대부터 우리민족은 강력한 해양지배세력이었다. 일본이 강성해지기 전까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바다를 제패한 국가였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강한 국가가 아니었다. 이순신 제독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수군(水軍), 즉 해군의 힘이었다. 조선의 배는 일본 배보다 훨씬 크고 강한데다 매우 견고했다. 일본 배는 작은 병력수송선에 불과했다. 전투함이 아니었다. 거북선은 대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일본 배는 작고 약해서 대포를 설치할 수 없는데다 대포를 쏘면 배가 뒤로 밀려나갔다. 임진왜란은 바다에서 결판난 전쟁이다. 대포로 이긴 전쟁이다. 삼국시대 장보고를 보라. 청해진을 비롯해서 중국까지 제해권을 장악하지 않았나.

 

- 고려 때도 수군이 강성했다.

▲ 그 당시 고려해군이 얼마나 강했는지 역사가 말해준다. 징기스칸이 이끌던 몽고족이 고려를 점령했을 때, 일본정벌을 위해 고려해군과 함께 출항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몽고는 동서양 넓은 대륙을 정복했지만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해양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고려왕이 강화도로 피신해 40년을 버틴 것도 결정적으로 몽고군에게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몽고군은 500여 미터에 불과한 강화도 해역조차 건너오지 못했다. 다른 민족은 무너졌어도 유일하게 수십년을 버틴 나라가 고려다. 해군 때문이다. 이제라도 강성했던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해양역사를 알려야 한다.

 

- 영국도 한때 해양을 장악했는데.

▲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바다를 제패해 세계를 경영했다. 당시 영국 해군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대영제국이 번영한 이유는 군사조련술 때문이다. 과거 스페인 연합함대와 합류한 프랑스 해군과 영국의 넬슨 해군제독이 ‘트라팔가’에서 싸웠다. 모든 면에서 병력숫자로나 물적으로 열세했음에도 영국이 압승했다. 어떻게 이겼을까. 영국해군의 민첩하고 숙달된 대포 발사 속도 때문이다. 프랑스보다 세 배나 빨랐다. 영국해군은 대부분이 소년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옛날 함대는 배가 작아서 몸집이 큰 사람은 해군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병을 뽑았다. 좁은 배 밑에서 대포를 쏘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해군이 승승장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 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세일러(Sailor)를 꿈꾼다. 해군이 되는 게 꿈이다. 대영제국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 예나 지금이나 해군력이 중요하다.

▲ 바다에서의 전쟁은 육군의 칼싸움과 다르다. 해전의 효시와 해군시스템도 대부분 영국에서 시작됐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한발 쏠 때 영국은 세 발을 쏘았다. 요즘의 함포다. 옛날 구식 대포는 사정거리가 짧아서 배가 양쪽에 가까이 붙어 쏴야 했다. 정확하게 쏘는 게 관건이다. 그러려면 재빠르게 대포장전을 해야 한다. 보통 대포 한발 쏘는데 몇 분씩 걸린다. 대포 안에 장약을 넣고 꾹꾹 눌러 다진 후 포탄을 넣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심지를 달고 불을 붙이면 장약이 터지면서 포탄이 발사된다. 이 과정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에 1시간에 몇 발 밖에 못 쏜다. 기동력이 빠른 영국해군에게 프랑스가 패한 것도 대포 때문이다. 넬슨 제독이 강해서가 아니라, 영국해군이 강했기 때문에 대영제국이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 정치인으로서의 ‘신기남’과 작가로서의 ‘신영’을 말한다면.

▲ 2년 전의 정치인 신기남은 이제 없다.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정보정책위원장 신기남의 활동은 계속된다. 소설가 신영의 작품 활동도 계속될 것이다. 양쪽 모두 충실하게 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서 봐주었으면 한다. 과거의 신기남은 소설가가 아니다. 신영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점을 혼돈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정치인이 글을 쓴다고 하면 이상한 선입견과 편견을 갖고 있어서다. 출판사에 소설을 낼 때에도 책에 신기남이란 이름을 넣지 말아달라고, 순수하게 작품으로 승부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출판사 측은 ‘그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필명을 쓰더라도 본명을 밝히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나의 경력이 출판사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프로필에 본명을 넣게 됐다. 그러나 지금도 작품으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 롤 모델이 최인호 작가라고 했다.

▲ 지난번 광화문 기자회견장에서 어느 기자가 롤 모델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흔희 소설가를 심각한 얼굴로 글 쓰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기 쉬운데, 나는 평소 생각한대로 최인호 작가를 말했다. 옆에서 사회를 보던 박민호 서울대 교수가 ‘최인훈이요?’라고 물었다. ‘아니 최인호’라고 다시 전했다. 최인훈 씨도 비중이 큰 작가지만, 최인호 씨는 대중소설을 많이 쓴 작가다. 우리나라 문학, 특히 소설계에 공헌한 부분이 크다. 최초의 인기 작가였고 그 당시에 소설을 써서 집을 사고 차까지 샀다. 이전에 소설가라는 직업은 가난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최인호 씨가 어느 날 혜성같이 뜨면서 소위 인기작가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의 영향으로 젊은 사람들이 소설가 지망을 많이 했다. 그때부터 소설가도 글을 잘 쓰면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외수 씨와 김주영, 박범신 씨 등도 이때 등장했다.

 

-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 최인호 씨가 대중적인 소설을 썼지만, 비중이 가벼웠냐면 그렇지도 않다. 깊이 있는 역사 소설도 많이 썼다. 그러면서도 재미있고 깊이가 있으면서 굉장히 글을 잘 쓰는 작가였다. 나는 소설이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히트작 ‘별들의 고향’의 경우 통속소설로 보이지만, 어쨌든 그의 소설이 대중적 영화로 만들어지는 효시를 이뤘다. 그분을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글도 좋지만 독자들로부터 폭넓은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로이면서 대중적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프로는 깊이와 재미와 대중성을 가져야 한다. 최인호 씨는 그런 면에서 탁월한 분이다. 물론 최인훈 씨도 존경할만한 분이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나 사람’도 재미와 대중성면에서 각색을 달리 했다. 좀 더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방식으로 쓴 장편소설이다. 책 안에 발칸지역 지도를 상세히 그려 넣었고, 예술작품도 수록했다. 대중성과 마케팅을 높이기 위해서다.

 

- 소설가로서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이제야 갈 길을 제대로 찾았다. ‘꽃이 잎을 버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2년 전에 정치라는 꽃잎을 버렸다. 소설가로서의 큰 열매를 맺고 싶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바랄뿐이다. 30년 간 구상한 ‘목련의 연인’과 같은 장편은 처음이지만,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과 지식들을 농축시켜 발효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문학적 자부심이나 소양면에서 결코 미약하지 않음을 감히 말씀을 드린다. 40년 늦게 출발했지만, 오히려 그런 경험들이 풍부함을 더하고 다양한 장르의 글을 섭렵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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