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을 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허연,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오십 미터》

 

이번 겨울은 눈을 좋아하지 않는가보다. 어릴 때면 눈이 내리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항상 아직 어려서 눈을 좋아할 수 있는 거라고 말했다. 어른이 되면 눈을 반드시 싫어해야 할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인지, 눈이 좋다. 눈이 내리면 좋고, 쌓이면 만질 수 있어 더 좋다. 만지면 손이 시려 빨개지는 것이 좋고, 입김이 푸른 하늘 위로 하얗게 번져가는 것이 좋다. 눈이 오면 부지런할 수 있어 좋고, 부지런하게 눈밭을 걸을 수 있어 좋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가서 새하얀 발자국을 찍고 나면 그제야 나도 겨울을 사는 것만 같았다.

허연 시인을 만나면 묻고 싶다. 그는 겨울을 살고 있느냐고. 그의 시는 겨울에서 시작되어 겨울에서 끝난다. 그래서 이 겨울이 다 가기 전 그의 시가 막연히 떠올랐다. 그리고 눈이 많이 내리는 허연의 겨울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었다. 가물어버린 올 겨울에 있어 그의 태도와 마음은 우리가 항상 꿈꾸고 바라는 계절의 이상을 상기시킨다. 그 이상이 마냥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일 수도 있겠다. 그의 겨울은 지나간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에 앉는 시간이다. 멀리 떠나간 그 무엇도 결국엔 시간만 되면 도로 눈송이가 되어 가라앉는다. 그리고 소복이 쌓여 겨울나무를 만든다. 가벼워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다시 무겁게 나무 위로 내려앉고, 오롯이 시인이 지고 가야할 무게가 된다. 허연에게 겨울은 무게를 느끼는 때인 것 같다. 그 무게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걸 느끼는 시간이 우리에게 어느 순간 찾아온다는 것 모두가 얼마나 경이롭고 이상적인지 문득 알 수 있다.

 

사진=pixabay.com
사진=pixabay.com

겨울이 갖는 무게감이 주는 주제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허연 시인이 겨울이라는 시간성에 씌워놓은 테마 혹은 이야깃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연의 시가 갖는 영화적 구조는 뚜렷하게 연상되는 이미지에 의해 이끌어지는데 그 중간 중간 이미지가 설명할 수 없는 추상성이 덩그러니 놓여있기 때문에 그 테마가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허연 시인은 시가 갖는 시간성과 추상성, 그 외에도 형체 없는 모든 것들을 다루며 그 본질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질과의 싸움보다는, 그 모두를 자신의 테마를 통해 집결시켰다. 이미지가 장면이 되고, 장면들이 플롯이 되고, 하지만 플롯이 스스로의 전개를 포기함으로써, 아슬아슬한 경계에 멈춰있는 허연만의 겨울이 완성되는 것이다. 세 가지 주제는 시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추억, 재난, 망각. 그리고 이 셋은 다시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이 결말은 허연이 다루고자 하는 무게감이라는 게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인지 암시한다.

추억은 눈송이처럼 소리 없이 쌓이고 그것들은 겨울에 도달할 때까지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하나의 추억씩 바라보면 아름답겠지만, 여럿이 뭉치고 무거워지는 순간 결국 재난이 된다. 겨울나무처럼 굳건히 그 무게를 견뎌내고 싶겠지만 마음대로 쉽게 되는 것은 없다. 눈물이 흐르고, 북회귀선 아래 겨울을 갖지 못한 열대의 나라에선 소포가 온다. 그 소포의 내용은 결코 겨울과 상관없는 것일 테다. 열대에서는 단 하루의 겨울도 허락되지 않으니까. 그들은 겨울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겨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흐르는 눈물은 그런 소포의 무정함에서 비롯된다. 나는 북회귀선 위에, 당신은 그 아래에 있으니, 당신이 보낸 소포가 무엇이든 나의 겨울은 겨울이다. 그 선명한 경계를 어쩔 순 없다. 눈물이란 그런 어쩔 수 없는 마음에서 흘러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겨울이 가야할 길은 오직 망각뿐이다. 재난이 되어버린 추억을 잊어버려야 겨울은 겨울을 벗어날 수 있다. 이제야 허연 시인이 ‘눈송이들의 거사’라며 거창하게 말하던 것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나와 당신이 경계 바깥으로 서로 멀어진 이후, 추억들이 거사를 일으키는 재난과 망각의 시절. 허연의 겨울이란 그렇다. 허연은 그런 겨울을 살아가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완전한 종료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죽음은 없다. 눈송이들이 떨리며 떨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죽음의 과정 속에는 두근대는 삶이 있다. 추억을 망각하는 모든 과정 속에는,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된 무언가가 꾸준히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어느 영혼은 북회귀선 아래까지 떠내려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당신이 있는 열대의 나라를 알게 되고, 당신은 나의 겨울을 비로소 알게 될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