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사막, 거대한 안데스의 만년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메마른 사막, 거대한 안데스의 만년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9.01.31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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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스물두 번째 이야기 / 강진수

 

43.

사막을 비추던 뜨거운 태양도 밤의 숨결 뒤편으로 물러섰다. 아타까마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작은 마을은 도시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점차 그 자신만의 야경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달의 계곡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나와 형은 이미 매우 굶주려 있는 상태였다. 체력은 체력대로 고갈되어 있었고, 하루 종일 사막의 날씨에 상당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당장 저녁을 먹어야만 했지만, 레오와 로게르 그리고 라리샤와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기에 그들을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로게르와 라리샤는 종일 자신들의 숙소에서 쉬고 있었기에 금방 우리와 연락이 닿아 만났지만, 레오는 자전거를 타고 달의 계곡을 둘러보러 떠난 뒤 연락이 없었다. 일곱 시즘 되었을까, 로게르와 라리샤를 만나 먼저 식당에 가기로 했다. 레오에게서 연락이 오는 대로 식당으로 데려오면 될 것이다. 더 이상 배에서 나는 굶주린 소리를 들어 넘길 수가 없다고 우린 판단했다.

 

자그만 마을에 식당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지만 메뉴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여행객들을 위한 마을인지라 온통 피자, 파스타, 스테이크와 같은 서양 음식이 주를 이뤘다. 우리는 칠레 음식을 맛보고 싶었지만 결국 외양이 근사해 보이는 파스타 가게를 골라 들어갔다. 막 음식을 시키고 나자 레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역시 막 숙소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마침 식당이 숙소에서 별로 멀지 않은 덕분에 내가 가서 레오를 데리고 돌아왔다. 드디어 네 명이 반나절 만에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하마터면 길고 긴 이별을 할 뻔 했던 몇 시간 전, 우리는 정말 놀라운 우연으로 이별을 면했다. 그리고 갖게 된 이 소중한 식사 시간,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별다를 것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아쉽고 애틋했다. 지난 나흘간의 함께 했던 추억들을 되새기며 느릿느릿 식사를 마무리했다.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너무 아쉬워 우리는 마을 한복판에 있는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름 이 마을에서는 가장 큰 가게인지, 들어가자마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과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종업원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넸다. 신나는 음악 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는 조금이나마 한적한 2층에 자리 잡고 앉았다. 맥주를 한두 잔 들이켜자 그제야 그날 하루의 긴장과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의 날을 즐기자는 기분으로 유쾌한 웃음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함께 한 나흘의 밤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 동안 얕은 농담들과 깊은 대화들을 수도 없이 나누었다. 같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각자의 나라와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 동물, 인상 깊었던 풍경, 살아온 문화를 공유하느라 쉴 새 없었다. 이 낯선 땅에 와서 만나게 된 낯선 우리들은 어째서 좋은 친구로, 추억으로, 인연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혼자서만 브라질행을 택한 에이미를 우리 모두 떠올리며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브라질로 잘 가고 있을까. 지금쯤 비행기를 탔을까. 에이미에게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정말 마지막 사진을 남기고 나서, 취기가 오른 몸을 일으켜 펍을 나섰다. 캄캄해진 하늘과 노랗게 가로등에 물든 흙벽, 그리고 먼지가 이는 사막의 거리를 걸으며 우리 다섯은 노래를 불렀다. 다시 만날 날과 우리의 우정을 되새기기 위한 노래. 그리고 낯선 세계의 마을에서, 그 자그만 광장과 황량한 길목에서 신나게 춤을 췄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아쉽고 안타까울 수 있는 이 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기로 했다. 다시는 영영 보지 못할 사람인 것 마냥 이 순간을 괴로워만 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남은 여행을 어떻게 마칠 수 있을까.

숙소 앞에 다다르자 커다란 나무 대문 앞에 개 서너 마리가 우리를 보고 일어나 꼬리를 흔든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개들을 쓰다듬으며 우리는 지난 나흘간의 추억과 작별을 했다. 미련이 남는 악수와 포옹, 키스를 나누며. 벌써 깊어 온 밤, 해가 뜨고 아침이 되면 일찍부터 나와 형은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나자며 약속을 주고받고 서로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막의 밤은 허전하고 외롭다. 하지만 해가 뜨고 나면 다시 새로운 만남에 기뻐하겠지. 이른 아침 산티아고행 버스를 타야했기에 얼른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44.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짐을 챙겨 숙소를 빠져나왔다. 터미널은 마을 바로 바깥에 있어 멀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길을 걸어가면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스쳐 지나가는 많은 생각들은 어쩔 수 없었다. 버스는 금방 터미널로 들어섰다. 칠레의 고속버스는 페루나 볼리비아의 버스보다는 가격대가 훨씬 높다. 대신 버스가 더 크고 내부도 잘 정돈되어 있으며,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정중하고 서비스 의식 있는 승무원 또한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승무원들이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물이나 음료를 조금 제공하거나 배가 고플 때 즘 약간의 음식을 가져다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페루 쿠스코에서 볼리비아로 넘어갈 때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타까마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칠레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세로로 가로지를 정도로 길쭉한 모양의 땅을 자랑하고 있으니 아타까마와 산티아고 사이의 거리 역시 어마어마한 것이다. 버스로 무려 24시간을 꼬박 달려야 산티아고에 닿을 수 있다. 중간에 잠깐씩 멈춰 선다고 해도, 승객을 더 태우려 서는 것이지 한국처럼 시설이 잘 된 휴게소에 서는 것이 아니므로 꼼짝도 못하고 버스에서 24시간을 보내야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버스 내부에 작은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다. 페루와 볼리비아의 버스에 비하면 나름 깨끗하고 쓸 만한 화장실이지만 용변을 보기에 불편한 점이 분명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버스 안에서만 아득바득 버티면서 산티아고를 기다려야만 한다니.

 

하지만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은 다시 그런 모든 고민들을 저편으로 제쳐두곤 했다. 남아메리카 대륙에 와서 매번 느끼는 것은, 버스 안에서 바깥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행성 또는 우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메마른 사막을 지나면 거대한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이 반짝거리고, 다시 드넓은 바다가 보이며, 어느새 알록달록한 건물들로 둘러싸인 나를 발견한다. 밤이 되면 쏟아지는 은하수의 별빛, 버스에서 주는 담요를 턱 끝까지 뒤집어 덮고 한껏 웅크리고 자다보면 저 멀리 지평선에서 여명이 밝아온다. 햇빛이 버스 안으로 스미자 승객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승무원이 따뜻한 차와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양도 적고 맛도 전혀 없지만, 그 이른 시간이 주는 분위기와 느낌이 있다. 그리고 곧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기대감은 버스 안의 승객들 모두를 설레게 만든다. 다시 바다가 멀어지고. 어느새 낡고 아담한 건물들이 가득 들어선 길가로 버스가 들어선다. 산티아고다. 웅크린 몸을 움직여 기지개를 켠다. 드디어 칠레의 심장,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길 것만 같던 나의 여정이 드디어 절반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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