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옛날옛적 촌놈의 연애행각(1)

 

아마 이렇게 걸었으리라
아마 이렇게 걸었으리라.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다가 말았다.

‘설날에 조카들의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챙겨주고 있노라니 옛 생각이 절로 나더이다. 세뱃돈을 목적으로 정신없이 세배를 다녔던 시절이 어제만 같은데 세뱃돈을 챙겨주고 있으니 내가 이게 지금 뭐냐, 하는 식의 회한 같은 것은 아니었고요.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당신을 찾아서 그 엄청난 눈 폭풍 속으로 즐겨 빠져들곤 했던 그 시절의 맹랑한 열정이 유쾌한 기억으로 살아난 것이니,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누군가의 말이 제법 리얼하게 와 닿기도 합디다. 그때 만일 당신과 내가 제대로 잘 엮여졌더라면 지금 어떤 모양일까요? 하앗, 참.’

컴퓨터 시대에 컴퓨터 키보드도 아니고 볼펜도 아닌, 잘 깎은 연필로 흰 종이에 또박또박 그렇게 쓰다 말고 나는 그만 멍해져 버렸다. 내가 이게 지금 뭔 정신 나간 놀이를 벌이고 있는 거지?

설날 오후 두 시쯤이었다. 세배를 받고, 차례를 끝내고, 음복이란 명분의 술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동생들도, 제수씨들도, 조카들도 다 친정으로, 외가댁으로 혹은 처가댁으로 간 뒤의 어느 순간이었을 것이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있는데 홀연 그 시절이 떠올라 왔다.

그게 언제였는지, 생각하면 아득하다. 내가 이렇게도 많은 세월을 거쳤구나 싶어 황당하기도 하다. 어쨌든 거기 어디에 그녀가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그 어느 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

그녀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영 불충분하고, 이 세상 모든 인연의 동기를 다 합쳐야만 할 것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그때 내 나이는 몇이었을까. 이 또한 모호하다. 세배를 드려도 이제는 어른 다 됐으니 세뱃돈 같은 것은 안 준다는 농담과 함께 어른들이 술잔을 권했었다는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팔청춘, 열여섯 살 전후라고 보면 거의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세배가 즐거운 조카
세배가 즐거운 조카

요즘은 설 명절이라 봐야 당일치기로 후딱 해치우거나, 제대로 차린다 해도 이삼 일 정도에 끝나버리지만, 그 시절의 설 명절은 정월 대보름 불놀이까지 이어지는 대단위 축제였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떡을 해도 말떡이요, 식혜를 만들어도 엿기름이 한 말씩은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쌀떡 쑥떡 인절미에 조청이며 산자 같은 것들을 뚜껑 있는 바구니에 켜켜이 담아 쌓아 놓고 손님이 오면 굽거나 찌거나 덥혀서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들판 쪽으로 시선을 던지노라면 언제나 한두 그룹쯤은 세배를 나선 사람들이 그림처럼 보였다. 타동네에서 우리 동네로 오는 세배객이 있는가 하면, 우리 동네에서 타동네로 세배를 가는 그룹도 있었다. 그 속에는 언제나 두세 명쯤의 꼬맹이들이 끼어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세배 원정을 나선 아이들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세배 원정이라 부를 만했다. 눈만 뜨면 돈이 보이는 요즘과는 달라서 돈 구경하기가 매우 힘든 시절이고 보니, 아이들은 누구나 없이 설날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설날이 오면, 떡이고 과일이고 다 귀찮다는 투로 정신없이 세배를 다녔다.

오전에는 가까운 일가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일원짜리 동전 한 닢씩의 세뱃돈을 거두고, 오후에는 일가친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듯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집이라면 무조건 들어가서 넙죽 절을 하고 세뱃돈을 받아 챙긴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앞마을 뒷마을로 세배를 다니고, 사나흘쯤 뒤부터는 십리도 좋고 백리도 좋다는 듯이 어른들을 따라서 멀리로, 그야말로 원정을 나선다.

지금이야 뭐 직계 혈족이 아니면 얼굴도 거의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디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시골 사람들에게 있어 친척은 가족의 다른 이름이었고, 때문에 사촌 오촌은 물론이고 칠촌, 팔촌까지도 어른이라면 가능한 한 세배를 다니는 게 인심이었다.

 

이런 시절에
이런 시절에

몸만 달랑 가는 것도 아니다. 일단 날짜가 잡혔다 하면 엄마는 아침부터 몸단장 하랴 어른 대접할 음식 준비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윽고 준비가 다 끝나면 술병을 든 아버지가 앞장을 서고, 정갈한 보자기로 예쁘게 싼 냄비를 든 엄마가 그 뒤를 따르는데 냄비 안에는 고명을 얹은 떡국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고기와 생선 등 안주거리를 싼 보자기를 들고 졸망졸망 따라가면서 지금까지 벌어들인 세뱃돈이 얼마인데 앞으로 얼마를 더 벌어야 한다는 둥 잠시잠깐도 입을 닫아놓지 않고 떠들어댄다.

이런 행사는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일단 갔다 하면 그 마을 친척들과 어울리게 되고, 어울리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져버리기 때문에, 다른 마을 친척 어른은 다음 날 다시 준비해서 찾아가야만 하니, 설 명절은 정월 대보름까지 쭉 이어지고도 시간이 모자라서 어떤 해에는 정월 말, 심지어는 2월까지 연장되기도 한다.

이런 문화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다 자란 뒤에도 설 명절이 오면 세배 원정 문제를 놓고 날짜를 잡는 등 부산을 떨게 되는데, 이때의 세배는 물론 세뱃돈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세배 자체에도 별 의미는 없다. 세배나 세뱃돈보다 훨씬 더 귀한 어떤 것, 이를테면 날마다 보는 얼굴들이 아닌 새로운 얼굴에 대한 선망이요 호기심이요 끌림이고 설렘이다.

그것 참 묘한 일이다. 그가, 혹은 그녀가 내게 무슨 약속을 한 바도 없고, 보고 싶다고 말한 바도 없건만 나는 그를, 혹은 그녀를 보고 싶어 하고, 지금 가면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먼 길을 나서는 것이니, 서정적으로 말하자면 순수한 열정이겠고, 분석적으로 말하자면 정신착란 같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해의 그날, 오촌 고모님의 아들이 우리 동네로 세배를 온 까닭도 아마 그와 같았을 것이다. 나이는 나와 같지만 생일이 빨라서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그는 외가댁에 세배를 와서 그야말로 잘 놀았다. 수많은 누이들이 오빠, 오빠 하면서 따라 주었고, 누나들 또한 동생, 동생 하면서 예뻐해 주었다. 손에 쥔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풍성해져서 떠날 채비를 차리던 그가 느닷없는 소리를 내게 했다.

“수복아, 우리 집 갈래?”

“응?”

나로서는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다. 외가댁에 세배를 가는 일은 있었어도, 멀리 있는 오촌 고모 댁에까지 세배를 갔던 유례는 도무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금방 설레었다. 하긴 새로운 경험의 기회가 왔는데도 그걸 뿌리친다면 김수복이가 아닐 것이었다.

 

나무에 눈이 쌓이면
나무에 눈이 쌓이면

고모님 댁까지는 우리 동네서 얼추 삼십 리 길이었다. 쌓인 눈이 녹아서 질척거리는 삼십 리 길을 우리는 하루 종일 걸었다. 길이 양 옆으로 산을 끼고 있다 보니 다복솔 밑에 웅크리고 있는 토끼를 만나면 토끼를 잡자고 쫓다가 놓치고, 노루를 만나면 또 하릴없이 노루를 쫓다가 지쳐서 헉헉거려야만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엉망진창 더러워진 몸으로 고모님 댁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고모님은 친정에서 조카가 세배를 왔다고,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벌여야 한다는 둥으로 나를 우쭐하게 해주었다. 적나라한 음담패설을 어지간한 남자 뺨치게 해치우는 것으로 유명한 고모님은 아이를 다섯이나 낳아서 키웠지만 사춘기 선머슴아 같은 면이 있었다. 남편이 너무 일찍 죽어서, 외롭고 힘들어서 걸쭉한 입담과 우스갯소리로 자신을 달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어쨌든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올 준비가 돼 있었다고나 할까. 고모님의 호출을 받은 동네 아이들이 어둠을 뚫고 하나씩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자애들은 부엌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남자애들은 마루가 있는 정문으로 들어오는데 누구는 기타를 들었고, 또 누구는 단소를 들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보아 왔던 애들과는 다르게 뭔가 세련돼 보이고, 뭔가 더 성숙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우리 마을 애들과는 달리 뭔가 한두 가지쯤 더 있어 보이는 것이어서, 나는 점차 위축돼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의 어느 순간 그 일이 벌어졌다.

여자애들 중에 한 명이 부엌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내 눈과 딱 마주쳤다. 그녀와 나는 동시에 소스라쳐 놀랐다. 보자고 해서 본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뭔가를 그녀 몰래 훔쳐보다가 들킨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마구 뛰어서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 나는 아마 정말로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의 눈이 있는 쪽으로는 감히 시선을 두지도 못하고, 눈 아래 코와 입과 그리고 턱과 귀와 뭐 그런 쪽으로만 힐끗 힐끗 눈길을 주는데 그때마다 그녀 또한 나를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오는 것이어서, 나는 이제 숨쉬기조차 제대로는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녀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자 애를 쓰고는 있었다. 그 당시 인기가 좋았던 뽀빠이 과자를 산처럼 쌓아놓고, 맥주도 스물네 병들이 한 짝이던가 두 짝이던가를 들여놓고, 커다란 방에 동그라미 모양으로 빙 둘러 앉아 수건돌리기 놀이를 하는데 수건이 내 손에 들어오면 한 바퀴 빙 돌아서 그녀의 뒤에 살짝 놓고 달아나고, 그녀 또한 자신의 손에 수건이 들어오면 한 바퀴 빙 돌아서 내 뒤에 슬쩍 놓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탁 걸렸다. 술래가 된 그녀는 우선 노래부터 불러야 했다. 그녀는 어쩌나, 어쩌나 하면서 웃고 있었다. 손바닥 끝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웃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고귀하고 아찔하게 느껴지던지, 우리 동네 여자애들한테서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바 없는 나로서는 그만 기절이라도 해버릴 것 같았다. 아무튼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펴었네에.

노래를 하면서도 그녀는 가끔 손바닥 끝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고, 나는 이제 더 이상은 그녀를 훔쳐볼 수조차 없게 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었다. 그저 머엉, 할 뿐이었다. 가슴은 뛰다가 터져버린 것 같았고, 몸은 떨리다가 졸아붙어 버린 것 같았다.

 

눈

무슨 생각을 해보고 어쩔 것도 없는 상태로 밤을 보내고, 날이 밝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생각도 해볼 수 없었다. 멍한 상태 그대로 하루를 좋게 보내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야 뭔가 조금씩 보이는데 이걸 어쩌나. 사방천지 온 세상에 그녀가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을 때는 밥상 앞에 그녀가 앉았고, 걸을 때는 내 몸을 중심으로 전후좌우 사방에 그녀가 포진해 있고, 자리에 누우면 손바닥 끝으로 입을 가린 그녀가 천장에서 웃고, 있고, 우물에 가면 우물 속에서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에 처해버린 나는 어느 하루 저녁을 먹자마자 길을 나섰다.

눈보라가 몹시 험악하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쌓인 눈은 벌써 정강이를 넘었다. 코에서는 콧물이 줄줄 흐르고, 귀때기는 면도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은데도 나는 그녀의 동구 밖 과수원길 노래를 듣고 있었고, 손바닥 끝으로 입을 가린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발을 잘 못 디뎌 넘어질 때는 그녀를 불렀다. 이름을 몰라서 이름을 부를 수는 없고, 나와 동갑인 고모님의 아들이 누나라고 불렀으니 나 또한 누나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은데도 누나라는 호칭은 영 입에 안 붙어서, 그저 아가씨, 아가씨, 소리만 반복하며 눈 쌓인 산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모님 댁 앞에 당도했을 때, 그제야 나는 내가 정신 넋 빠진 사내라는 것을 알고, 한 시간도 넘게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거리다가 돌아서고 말았다. 불빛 하나 없는 집안이 너무 교교하고, 그 어두운 침묵이 마치 돌아가 인마, 하는 것만 같았다.

돌아서면서야 나는 밤이 너무 깊었다는 것을 알았다. 개 짖는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마을은 통째로 그냥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하릴없이 돌아서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새고 있었고, 눈보라는 그쳤다. 그 시절 나의 일방적인 연애행각은 이렇게도 불학무식하게 시작되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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