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3만 포기의 고추모종
3만 포기의 고추 모종

칠십대의 부부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간다. 남편은 분사기를 끌고 다니며 고추 모종에 물을 주고, 아내는 물통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남편이 물을 틀라 하면 틀고 잠그라 하면 잠근다.

물 주기가 끝나면 마주앉아서 고추 모종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나오는 잡풀을 뽑아낸다. 그림이 참 좋다. 보기에 좋아서 한참을 보고 있던 중에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남편은 허리가 꼿꼿한데 아내는 굽었다.

왜 혼자서만 허리가 굽었느냐고, 농담처럼 한 마디 했더니 미련해서 그리 되었다는 답이 돌아온다. 언제까지나 힘이 좋을 줄로만 알고, 무거운 고추 자루를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다니기를 수십 년 하고 나니 굽은 줄도 모르게 허리가 굽어 있더란다. 이런 얘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싸아해진다.

고추는 널뛰기가 매우 심한 작물 가운데 하나이다. 파종에서 이식, 관리, 수확, 판매 등등 어느 한 단계도 아슬아슬하지 않은 대목이 없다. 어떤 사람은 모종 단계에서 일찌감치 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애면글면 어떻게 잘 키워서 고추가 막 익어가기 시작할 즈음에 폭삭 죽어버리는 횡액을 당하기도 한다.

잘 키우고 잘 익혀서 잘 따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고추는 쌀이나 보리 같지 않아서 가격의 등락 폭이 매우 심하기로 유명하다. 작년만 해도 수확기에 육백 그램 한 근당 2만원 가까이까지 치솟았던 고추 가격이 두 달도 안 돼서 폭락하기 시작하더니 8000원대로까지 떨어졌다.

 

한 포기의 실패도 없는 고추 모종
한 포기의 실패도 없는 고추 모종

이른바 대박을 치는 농부가 있는가 하면, 폭망해서 한숨을 다발로 쏟아내는 농부가 도처에서 목격되기도 하는 이 고추 농사란 그렇다면 무엇인가. 고창에서 고추 농사 잘 짓기로 소문난 인물 가운 한 사람, 이현국씨를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고추 농사를 어찌케 해야 잘하는 거예요?”

“잘 봐야 해. 잘 보면 보여.”

잘 보면 보인다고? 이것이야말로 철학이요 과학이다. 뭔가를 아는 사람에게 그 말은 매우 심오하게 들리겠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다가 봉창 긁는 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하긴 농사란 기본적으로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식물을 다루면서 함부로 막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현국씨는 1월 21일에 파종을 해서 2월 12일에 포토로 옮겨 심는 가식 작업을 끝냈다. 2월 말에 본바탕 퇴비 살포를 했고, 3월 초에 땅을 깊이 갈아엎은 다음 중순께 로타리를 쳐서 비닐멀칭을 할 예정이란다. 그 다음 단계인 본바탕 이식 일정은 대충 잡혀 있지만 명확한 날짜까지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 날씨가 일정을 말해줄 것이다.

농사란 묘해서 드러나게 바쁜 일이 있는가 하면, 드러나지 않고 내밀하게 바쁜 일도 있다. 얼음이 꽝꽝 얼어붙는 1월 중순부터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3월 초순까지,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이 계절의 농촌은 내밀하게 바쁘다. 그냥 슬쩍 봐서는 도무지 바빠 보이지 않지만, 관심을 갖고 농부들의 일거수일투족으로 주시하고 있노라면 농사는 과학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와 닿는 순간이 온다.

 

고추 모종 앞에서의 부부
고추 모종 앞에서의 부부

농사 중에서도 고추농사는 이를테면 첨단과학이라 할 만하다. 중단 없는 관심과 지속적인 열정 그리고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계절의 고추농사는 긴장의 연속이어야만 한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고추 모종은 원인도 모르게 잎이 배배 꼬여가며 죽거나, 말라 죽거나, 뿌리가 썩어서 죽거나 타서 죽거나 하여튼 각종 방식으로 사라져 가기 때문에, 어디 멀리 결혼식장에 가서도 비닐하우스 안의 어린 고추 모종을 걱정해야 하고, 장례식장에 가서도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우스 문을 열어달라거나 물을 좀 뿌려달라거나 하여튼 뭔가를 부탁해야만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람의 일이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느긋하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문을 꽁꽁 닫아야 하는데도 안 닫고 있다가 다음 날 발견하고는 아이고 이런, 하기도 하고, 날이 갑자기 더워져서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도 잊고 있다가 한밤중에야 겨우 생각이 나서 달려가는가 하면, 물을 줘야 할 때를 못 맞춰서 내가 물을 주었던가 안 주었던가, 허둥거리기도 한다.

농사를 그런 식으로 긴장감 없이 지었는데도 제법 잘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이 보호하사이고, 잘못 됐다면 운이 나빠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다음 해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모종 단계를 생략하기도 한다. 생략이라고 했지만 사실상의 포기다. 모종을 키우는 과정이 너무 지난하고 어려워서 포기, 내지는 생략하고 다른 사람이 잘 키워놓은 모종을 사다가 농사를 짓는 것이다.

 

물을 틀고 끄는 아내의 허리는 왜 굽었는가.
물을 틀고 끄는 아내의 허리는 왜 굽었는가.

고추 농사에 관한 한 이현국씨는 달인 칭호를 붙여 마땅한 사람이다. 그는 매년 여섯 마지기의 밭에 고추 농사를 짓는데 실패라는 단어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이다. 여섯 마지기의 밭에 필요한 모종은 1만여 포기 정도면 충분하지만, 하는 김에 조금 더 한다는 생각으로 3만 포기 이상을 길러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농사건 뭐건 그것을 대하는 자세도 다르겠지만, 이현국씨는 꾸준히 관찰하고, 분석하고, 생각해서 아 이것이 그것이로구나, 싶은 순간이 왔을 때 행동하는 이를테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농사 방식을 지향한다. 때문에 그는 전통적인 방식이라 해서 무조건 따르거나 배척하지 않고, 신기술이라 해서 덮어놓고 흉내를 내거나 외면하지도 않는다.

알고 보면 고창에 지금과 같은 방식의 고추 농사 방법을 도입한 사람도 이현국씨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창의 고추 농사는 5월에 밭을 갈아서 씨앗을 뿌리는 직파 방식이었다. 씨앗을 잔뜩 뿌려서 싹이 나오면 나중에 솎아내고, 남은 것들로 본격적인 고추 농사를 짓는데 열매는 여름이 다 돼서야 열리기 시작하고, 빨갛게 익은 고추는 가을이 다 돼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가을걷이 시기에나 고추 수확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방식의 고추농사밖에 몰랐던 이현국씨가 새마을 지도자 자격으로 충청도 보은에 선진지 견학을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고창의 고추는 이제 겨우 싹이나 나오고 있는 시기에 충청도 보은의 고추밭에서는 벌써 열매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주는 남편은 꼿꼿하건만...
물을 주는 남편은 꼿꼿하건만...

이현국씨가 새마을 지도자로 지명되기까지의 과정도 알고 보면 드라마틱하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관념이 유행이던 시절에, 공부 머리가 제법 있었던 그는 일찌감치 서울특별시민으로 편입해 들어갔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은 없다 해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유지하던 시기의 어느 날 고향행 열차를 타야만 할 상황이 발생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병환이 깊어져서 보호자가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병원이란 먼 나라의 얘기였다. 집에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하루 24시간 내내 지켜보며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야 했다. 처음 생각으로는 일 년 정도 지극정성으로 살피고 나면 회복되어 예전처럼 바깥출입도 하고, 당신들 스스로 끼니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그런데다 또 생각지도 못한, 너무나 엉뚱한, 너무 황당해서 기도 안 막힐 사건이 터졌다. 허드렛물도 데워 쓰고, 우거지도 삶아내고, 빨래 같은 것도 삶고 하는, 마당에 걸어놓은 가마솥이 문제였다.

어느 하루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장아장 걷는 시기의 아이가 도대체 무슨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인지, 부뚜막을 타고 오르다가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빠지고 말았다. 화상을 크게 입은 아이는 백약이 무효하게 그만 유명을 달리해서 부모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퇴비를 잔뜩 깔아놓은 미래의 고추밭
퇴비를 잔뜩 깔아놓은 미래의 고추밭

통곡을 하고, 또 해도 아이는 부활하지 않고, 기억으로만 남아서 부모의 슬픔을 가중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로 돌아갈 의욕이, 희망이 생길 리는 만무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나 올려다보며, 슬픔을 깨무는 이현국씨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호랑이가 호랑이를 알아보듯이 사람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매사에 성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이현국씨를 주시하는 눈은 많았다. 그는 면사무소를 선택했고, 면서기가 되어 출근하면서부터 농사가 기반인 농촌의 농사기술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이런저런 나름의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랬던 그가 직접적으로 고추 농사에 뛰어든 것은 고추 파동을 겪고 난 뒤였다. 당시 80킬로그램 쌀 한 가마 가격이 2만9000원이었는데 고추는 600그램 한 근당 가격이 무려 9000원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5월 중 고추 모종이 완료된 뒤에 이어갈 예정입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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