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남미여행기-스물네 번째 이야기 / 강진수

 

47.

산티아고에 머무른 지 사흘째 되던 날,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활달한 사람들 그리고 한결같이 따사로운 날씨에 권태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미를 여행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형과 나는 페루, 볼리비아의 척박한 환경과 낯선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모든 기력을 다 쏟아 붓고 말았다. 게다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물가가 만만치 않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전에 최대한 예산을 아껴두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페루와 볼리비아의 물가가 매우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고 자는 것에 최대한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난의 행군 끝에 형은 산티아고를 둘러보는 것을 포기하고 숙소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형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충분한 수면이 필요했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 먹고 잠들고 다시 저녁을 먹기 위해 깨고. 이런 일정으로 하루, 이틀을 보내자 권태로움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자였다. 산티아고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자였기에, 나는 산티아고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남미를 여행하면서 가장 크게 부딪친 계기가 되었다. 한쪽은 그동안 여행에서의 여느 때보다 생활하기 편하고 휴식하기 좋은 대도시 산티아고에서 다음 행선지를 위한 재충전을 하길 바랐을 뿐이고, 다른 한쪽은 함께 여행을 온 우리가 부질없이 시간들을 침대에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아 조급했을 뿐이다. 단 며칠이 아닌, 꽤 긴 시간동안 계속되어야 하는 여행이기에 이런 사소한 갈림길에서 결국 지난 감정들이 폭발하고 만다. 사람과 사람은 아무리 마음이 잘 맞고 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형은 시큰둥하게 점심을 먹고 침대로 돌아갔고, 나는 성질이 나 있는 채로 혼자 도심을 휘젓다가 돌아와 다시 함께 저녁을 먹곤 했다. 그것은 결코 우리가 바라던 휴식이 아니었고, 그런 감정 소모는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리라 단 한 번도 예상해 본적 없는 난관이었다.

 

아침부터 형과 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날이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에 나는 혼자 호스텔 근처 공원을 거닐었다. 주머니 속을 뒤져보니 동전과 지폐가 있었고 당장 동네 마트로 가 맥주를 한 묶음 샀다. 그리고 공원에 다시 자리 잡고 앉으니 금세 그곳의 공기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앉아있고 사랑을 나누는 커플들도 많았지만, 나처럼 혼자 벤치에서 맥주를 몇 캔씩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날이 너무 더웠고 무언가를 먹기보단 갈증이 너무 났으며 어차피 잔소리해줄 형도 옆에 없겠다, 나는 무작정 마음가는대로 술주정뱅이가 되어가던 것이었다. 사 온 맥주를 같이 마셔줄 사람도 없는 채로 모조리 들이킨 채 취기가 올라 잠깐 숙소에 들어갔다. 형은 잠시 나가 방에 없었고, 취기 그대로 종이 한 장에 뭐라고 잔뜩 써놓고 침대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숙소를 나왔다. 아마 형에 대한 심술과 불만, 원망 등으로 그 종이는 얼룩져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다툼이 생길 수 있는 긴 기간의 여행이라지만 그런 식의 불만 표출은 너무나도 철없고 어리석은 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서로 썩혀가던 마음 한 구석은 결국 함께하는 상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튀어나와 버렸다. 서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함께하는 여행이란 이루어질 수 없다. 그토록 간단한 것을 쉽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도전장은 던져졌고, 이젠 혼날 일만 남았달까.

다시 맥주를 새로 한 묶음 사서 공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쳐다보았을 것이다.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무슨 사연 있는 것 마냥 주구장창 맥주 캔들을 비워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없이 또 새로운 맥주를 뜯는데, 세 명의 현지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스페인어만 할 줄 알았고 나는 거의 못했으므로 대화가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나 역시 이미 많이 취기가 올랐기에 그 초월적인 힘으로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로드리고, 아메리코, 레오나르도였다. 물론 그게 실명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은 내가 사는 나라에 대해 물어봤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언어로 농담을 건넸다. 휘파람을 불었고 노래를 불렀다. 전혀 알고 지낸 적 없는 그들과 어깨동무를 했고 맥주를 나눠마셨다. 그제야 여행이란 것이 참 제멋대로 굴러가고 마는구나, 느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느낌, 그것은 몸과 돈의 문제에도 해당되었지만 마음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분명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글거리던 해가 고개를 숙이고,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짤막한 인사만 나눈 채 서로의 집으로 흩어졌다.

 

48.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 내가 마주한 것은 분노에 가득 찬 형의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술이 깨기 시작했기에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일단 형은 내게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왔느냐고 추궁했다. 나는 더듬더듬 별 생각 없이 보낸 하루를 이야기했고, 그것은 다시 거대한 화로 되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타지에 와서 길거리에 나앉아 술을 많이 마시느냐고, 게다가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마냥 그들과 웃고 떠들며 술을 나눠마셨냐고. 불길처럼 타오르는 형의 얼굴을 보면서 아차, 싶었다. 형의 말이 전부 옳았다. 내가 무슨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유세를 떨며 하루를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며, 그렇기에 나의 행동과 마음가짐이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한참 혼나겠구나, 직감이 들었다.

 

그 이후로 몇 시간을 앉은 자리에서 형의 쓴 소리를 들었다. 내가 적어놓은 종이를 보며 함께 여행하는 우리 사이의 신뢰에 대해 말했다. 그간 낯선 곳에서 서둘러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쳐버린 몸과 마음이 여행 중반에 들어서 우릴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불만이 쌓이고 다툼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어떠한 대화 없이 오직 불만과 다툼만이 생겨난다면, 여행을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형의 쓴 소리와 함께 그간 내가 느끼고 힘들었던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랜 여행의 기간 동안 꼭 이런 임계점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형은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동생은 마음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여행은 성장의 기간이라는 말에서와 같이, 결국 성장통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것을 나와 형이 올바로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을 잘 보낸 것 같다. 우리는 겨우 다음 여행지로 향할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시간도 늦었고 저녁은 도저히 못해먹겠다, 형은 말했다. 그러고선 아까 저녁거리로 사왔다며 햄버거 세트를 하나 내게 건넸다. 햄버거라니, 대체 얼마 만에 보는 햄버거인가. 전형적으로 도시적인 음식을 입 안 가득 밀어 넣자 드디어 형도 나도 얼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사람은 너무나도 복잡한 것 같다가도, 지극히 단순하다. 여행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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