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유대칠 칼럼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생존’을 배우는 동안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나를 초라한 패배자나 남을 이긴 승리자로 아는 법을 배우는 동안, 내 안에 담긴 소중함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다. 남을 향한 마음도 나를 향한 마음도 배우지 못했다. 생존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많은 부모님들은 바쁘게 자식을 위해 사셨지만, 막상 돌아보면 함께 한 아름다운 추억은 많지 않다. 고생한 부모의 모습, 노력에 비하여 적은 결과에 실망하며 서로를 향해 독한 말로 분을 풀어내는 모습,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너 자신들을 위해 참고 산다는 말들. 결국 이런 것들이 많은 자식들에게 남겨졌다. 삶은 인내해야 하고, 이겨야 한다. 이 슬픈 세상에 대한 판단이 남을 사랑하는 방법과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 대신 배운 것들이다.

 

사진=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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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어린 시절 배운 ‘이기고 살라’는 말은 힘이 있다. 지금의 우리를 지배한다.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도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놓은 분에게 자신은 십자가 같은 것은 모르겠고, 그냥 승자가 되게 해 달라 기도한다. 모든 욕심을 버리라는 부처님의 앞에서 부디 승지가 되게 해 달라 절을 한다.

​이기고 살자! 그것이 삶을 지배한다. 우리 역시 아이들에게 이기고 살라 가르친다. 친구도 이겨야 하는 대상이다. 자신과 친구를 등수로 가치를 판단하게 가르친다. 그 소중한 천사 같은 아이들은 점수로 잔인하게 소리치는 부모의 잔인함 속에서 독해지거나 자신을 포기한다. 부모의 사랑은 비싼 과외 선생 아래에서 아이들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무시 받지 않아도 되는 옷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부모다.​

아이들의 기억 속 부모는 학원비와 과외비를 내어주는 존재이고, 좋은 옷과 음식을 내어주는 존재다. 아이들의 추억 속 같이 웃고 울었던 이들은 부모에게 돈을 받은 학원선생이고, 일시적 만남에 그치는 학원과 학교의 친구들이다. 서로를 점수로 판단하는 학원선생과 친구들이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주긴 힘들다. 결국 뜨거운 부모의 사랑 속에서 아이들은 삶을 외로움이라 알아간다.

추억이 없는 존재, 추억 속 부모는 소리치고 바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부모에게 추억은 쓸데없는 소리다. 훗날 승리자가 되면 자식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하여 아이들과 멀리서 살아간다. 아이들은 추억을 만들지 못한다. 아버지와 장난 치고 놀고 같이 공부하고 책 읽으면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웃는 이 모든 일들은 돈을 받은 누군가가 대신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배우지 못한다. 그냥 돈을 측량 가능한 것들 제공하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정도라고 할까.

나는 내 아이에게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한 그 순간 속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삶을 배울 것이다. 때론 싸우고 때론 웃으며 아버지인 나에게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그렇게 추억 속에서 아이들에게 녹아들어갈 것이다. 아이들은 나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나처럼 살지 마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나는 아이들이 부끄러운 아버지의 삶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한다”는 말 속에 까닭도 모른 채 아이들은 죄인이 된다. 잘 살아갈 두 사람을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감옥에 가둔 죄인이 된다. 나는 내 아이들이 당당하고 웃는 나에게서 당당하고 웃는 자신을 보기 바란다. 내가 바라는 더 당당한 나, 그런 나보다 더 당당한 삶을 살길 응원한다.

나는 “난 어려서 고생했는데 너는 왜 이것도 못하냐”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아이는 실수가 당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아니, 어른이든 아이든 삶은 실수의 연속이다. 그 실수에서 무엇인가 배우길 바란다. 그 뿐이다. 나도 어려서 실수 가득한 삶을 살았고 지금도 실수 가득한 삶을 산다. 나는 인생의 답을 안다는 식의 쓸데없는 자신감은 필요 없다. 오히려 실수는 많이 할수록 많이 배우더라 이야기하려 한다.

실패해도 상관없다. 남 속이면서 성공하기보다 당당하게 실패해라. 그리고 돌아서서 웃어라.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실패의 두려움이 싫어서 부모에게 자신의 그런 실패와 무능을 보이기 싫어서 거짓말 할 필요 없다. 내 아이들의 실패로 어떤 실망도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실패의 길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실패하다 마지막 순간 하느님 앞에서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아봤습니다” 말하는 것이라 믿는다.

 

사진=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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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자기 주체성에서 시작된다. 그 주체성은 주체성 강화 학원이나 극기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다운 주체성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사고에서 만들어진다. 그 반성이란 자신의 죄를 돌아본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본다는 말이다. 그 되돌아봄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나와 나의 아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남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존재의 한 조각으로 나와 나의 아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응원과 나와의 축구 그리고 야구 그리고 등산 그리고 같이 공부하며 서로 싸우고 화해하던 모습들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내가 쓴 책이 나오던 날, 나와 함께 기뻐하던 자신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또 어느 서점에 진열된 나의 책을 보며 아빠의 책이 여기 있다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자신들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추억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녹아든 나의 흔적을 마주 하게 될 것이다. 나와 아내는 우리의 추억을 통해 우리 아이들의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서 나를 본다. 아이들도 나에게서 자신들을 보게 될 것이다.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스스로의 삶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나를 소중해 여겨야 한다. 이런 나의 모습이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녹아들 것이다. 지금 귀하게 있는 나의 존재를 깨우칠 때, 나의 아이들도 스스로의 존재가 귀함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대나무로 어설프게 만든 나의 펜을 내 아이들도 이어 사용하길 바란다. 그렇게 두 녀석이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만나서 내가 만든 이 대나무 펜의 추억 속에서 아빠인 나를 만나 웃길 바란다. 그 때 그 자리에 내가 없어도 나는 녀석들의 옆에서 분명 제법 신나게 웃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더 당당한 나로 살아가는 너희들을 응원하는 아빠로 살아가는 것이 아빠는 그냥 좋다. 그것이 너희들이 너희들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첫걸음이라 아빠는 믿는다.

 

<유대칠 님은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면서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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