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수없이 반복했던 용인에 또 말썽이 일어나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장관 후보자 7명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끝났다. 도덕성·자질 흠결로부터 자유로운 후보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의혹 경연장’을 방불케 한 청문회였다. 부동산 투기, 탈세, 위장전입, 논문 표절, 병역기피 등 현 정부가 스스로 설정한 ‘인사검증기준’에도 저촉되는 후보자들이 태반이고, 명백히 실정법을 위반한 일탈도 수두룩하다. …”(경향신문 사설)라는 글을 읽으며 인사를 제대로 하기를 그렇게도 바라던 나로서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석무
박석무

조선시대에 인재를 제대로 추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율곡 이이를 단연 최고로 꼽습니다. 크게 드러난 사실로는 율곡이 추천했던 대표적인 7인이 있는데, 뒷날 모두 고관대작에 오르고 나라를 위해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 좌의정에 오른 정창연,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이덕형, 병조참판 이정립, 참찬에 오른 오억령 등 7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더구나 이항복·이덕형·이정립은 동방급제로 그때가 경진(庚辰:1580년)이어서 ‘경진3인’이라는 별칭이 있었으니 오늘로는 ‘3총사’인 셈입니다. 그들 모두가 율곡이 추천한 인물들이었다니, 율곡의 인재 알아보는 안목이 얼마나 높았나를 알게 해줍니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1792년은 정조대왕 16년 다산의 나이 31세로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어 마침내 그처럼 부럽던 옥당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임금이 음지에 있던 남인들에게 벼슬을 올려주려고 다산에게 추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무렵 인사가 있을 때마다 남인측은 겨우 1명 정도가 대통(臺通: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원으로 추천받는 일)이 되는 때인데, 다산은 남인계열의 28명을 골라서 그들의 가문, 과거 합격 성적, 문장력, 정치적 능력의 자세함을 열거하여 올렸더니 그 해의 대정(大政:요즘 같으면 정기 인사)에서 무려 8명이 대통이 되었고, 시간이 감에 따라 28명 모두가 대통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율곡 못지않게 다산의 인재에 대한 안목이 높았음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율곡의 안목, 다산의 안목을 거론하면서 왜 오늘의 정부에는 인재를 제대로 추천해주는 사람도 없는지, 제대로 인재를 발탁하는 일에 시원한 결과를 이루지 못하느냐에 대한 탄식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벌써 몇 번의 개각이 있었고, 수많은 인재의 등용이 있었는데, 언론이나 야당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 그만한 인물이면 ‘됐다’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청문회에 나오면 ‘송구스럽다’, ‘죄송하다’며 부끄러운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여야 하는가요. 율곡의 7인, 다산의 28인 참으로 면밀한 검토와 촘촘한 검증을 통해 객관적인 판단으로 추천했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인재들을 고를 수 있었는데 왜 요즘은 그런 추천자도 없는 것인가요. 

요즘처럼 정보에 밝고, 검증하기도 편한 세상에 적합한 인재를 고르기가 왜 그렇게 어려울까요. 청문회는 애초에 보지도 않지만, 신문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민망해서 읽을 수 없는 상태이니 마음이 너무 편치 않습니다. 제발 추천자들을 확대하여 올바른 인재 등용의 본 궤도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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