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사진=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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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라고 알려진 우리 네 명은 어느 날 바닷가 마을의 작은 민박집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좁은 방 한 칸에서 막걸리를 부어 마시며. 우리는 삼총사라고 알려졌는데. 어째서 이렇게 할 얘기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 여행은 우리 삼총사들의 이별 여행일지도 몰라. 여행을 떠나기 전날 학사 주점에서 밤새도록 떠들었던 이야기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마지막 레퍼토리.

더는 할 얘기도 없고. 멀뚱멀뚱 서로의 상판만 보고 있자니. 정말 우리가 그렇게 친한 친구들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기분 탓일까? 어제까지 우리는 형제나 자매라도 된 것인 양. 친숙하고 친밀했는데.

우리의 유년 시절이 너무나 비슷했기에. 우리가 읽은 책. 우리가 들었던 노래. 우리가 했던 사랑. 이 모든 것이 마치 한 사람의 일처럼 비슷했는데……

바닷가 마을의 민박집에서. 그런 것은 더 이상 우리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주지 않고. 지난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유년 시절. 다시 유년 시절의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유년 시절? 유년 시절이라니. 다루고 다뤄서 바닥까지 아는 얘기를 친구는 또 늘어놓았던 것인데.

나는 부모한테 많이 맞았어. 거의 학대 수준이었지. 처음 듣는 학대 이야기에 불현듯 삼총사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도 맞았어. 우리도 학대를 당했다니까?

이것 참 굉장한 공감대로군. 유년 시절에 학대당한 경험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일까? 맞고 자란 우리들의 취향. 우리들의 사랑. 미친 부모를 만난 탓으로. 우리가 서로 닮은 것일까?

아빠가 창밖으로 나를 던졌지. 2층에서 떨어졌는데 한 군대도 부러지지 않았어. 격양된 삼총사는 어떻게, 얼마나 맞고 컸는지 신나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니가 2층에서 떨어졌다고? 나는 3층에서 던져졌단다. 다행히 땅바닥이 잔디밭이라 찰과상만 조금 입었지. 어째서 우리를 던진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4층에서. 아빠가 4층에서 나를 던졌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어떻게 4층에서 던져졌는데도 그렇게 멀쩡하게 살아남았어? 게다가 어떻게 그런 부모랑 아직도 한집에서 살 수가 있니? 너한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너를 이해한단다. 내가 더 학대받았으니까. 나는 골프채로 두들겨 맞고 알몸으로 집에서 쫓겨났거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그랬구나. 너도 알몸으로 쫓겨났구나. 여름에 쫓겨났니, 겨울에 쫓겨났니? 나는 겨울에 쫓겨났었어.

정말로 겨울에 쫓겨났었니? 아무리 친구의 부모라지만 정말로 너무한 부모들이군. 니가 우리 삼총사 중에 가장 많이 맞고 컸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니. 더 이상 할 얘기가 딱히 없었다.

김승일, <같은 과 친구들>, 《에듀케이션》
 

김승일 시집 '에듀케이션'
김승일 시집 '에듀케이션'

‘현실적’이라는 묘사는 너무 잔인한 행위인 것 아닐까. 누군가는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드러내는 현실성이 우리가 현대에 살아가는 이유의 표명이라는 어떤 거창한 가치관을 내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현실에 살아가면서도 우리 스스로 현실적이며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니. 그리고 더 두려운 사실은,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어느 순간 현실성을 잃고 오히려 가짜 세계처럼 비추어진다는 것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같이, 더 나아가서 벗어날 수 없는 조현을 겪는 것만 같이, 현실은 거리감 있게 느껴지고 소설의 한 페이지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소설이든 시든, 지극히 그것들이 드러내는 현실적임이 얼마나 적나라하며, 얼마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긋지긋하면서도 끔찍한 이야기들인가. 김승일은 현실적 묘사를 다루는 듯 보이는 시인이지만, 그는 철저히 조현의 세계에 갇혀있다. 그의 이야기는 현실과 가상을 오가고, 그의 인물과 대화들은 잔인함과 연민을 오간다. 그의 그런 월담은 항상 읽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다가 말미에서부터 한 편의 서스펜스 영화 같은 결말로 치닫는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그만큼 긴박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미의 관점에서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김승일 시인의 시는 악몽일 수 있다. 위의 시 뿐 아니라, 그의 수 대다수에서는 아름다움 따위는 찾을 수 없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걸 향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그것을 느끼지 않는가. 그 직관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공간이 김승일 시인이 만들어 놓은 삶의 미로다. 미로에 갇히면 미로 내부를 둘러볼 겨를 없이 빠져나가는데 급급해지는 것처럼, 그의 미로는 우리에게 당장 삶을 벗어나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수많은 폭행, 그것도 부모라는 혈연에서 비롯된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은 우리가 그의 미로를 걷다가 마주하는 막다른 길이다. 길이 더 이상 없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다시 뒤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캄캄한 절벽을 맞이했을 때 느끼는 절망과 좌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김승일의 인물들은 그 절벽과 감정에 대해 담담히 말하지만, 그것은 전혀 담담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현실은 경험되어지는 것이고 언제든 다시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담담히 넘기기 어렵다. 당연히 좌절할 수 있다. 다만 미로에는 여러 막다른 길이 있고, 그런 길들을 수도 없이 거쳐야만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는 현실을 담담히 맞게끔 된다. 그리고 그 담담한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음을 알아차린 삼총사에게서 이를 느낄 수 있다.

김승일 시인을 만난다면 묻고 싶다. 당신은 대체 얼마나 불행했나요. 하지만 꼭 불행해야만 불행에 대해 쓸 수 있을까. 경험해야지만 불행은 알 수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기에 그는 꾸준히 끔찍한 현실에 대한 시를 쓴다. 아름다워야만 시가 팔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몇몇 시인들은 그런 무거운 주제를 철저히 외면하려들지만, 그런 외면은 시인을 아름다움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김승일은 반면 현실의 늪에 빠져드는 것도 모자라, 그 늪에 몸을 모두 담그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가 초인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사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김승일이 불행했다거나 불행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김승일,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니기에 현실을 살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진정 ‘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 확신에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그 확신을 명백히 할 수 없다. 그러나 김승일의 시는 냉소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꾸는 악몽은 우리 현실의 현재진행형이다. 조현의 미로에서 우리는 현실의 기로를 택했다.

원고를 쓰고 있는 시각, 3월 31일. 내일은 만우절. 미로를 기념하는 유일한 날을 앞두고 김승일 시인에 대해 몇 줄 적을 수 있다니 이것은 감사해야 할 일인가, 원망해야 할 일인가. 현실은 이토록 우습고 치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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