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9.04.1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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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록 여행스케치] 이야기가 있는 대구 골목 투어

어느 도시든 그 도시만의 특색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큰 도시, 대구광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이 도시의 진면목은 저 아스라한 역사와 전통에 있다. 골목마다 숨어 있는 유서 깊은 역사와 전통은 우리가 미처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그 호기심은 아픔일 수도 있고 그리움일 수도 있고 때론 기쁨일 수도 있다. 대구 사람들에겐 익숙한 곳이지만 외지인들에겐 낯선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약령시축제 행사의 하나인 한약재썰기경연대회(한의약박물관 제공)
약령시축제 행사의 하나인 한약재썰기경연대회(한의약박물관 제공)

☞건강한 젊음, 한약의 모든 것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한의약의 역사’로 자리매김한 약령시장(藥令市場)이다. 350년(1658년(조선 효종9년)개설) 전통을 자랑한다. 이곳은 경매를 통해 한약재의 값이 매겨지는 전국 유일의 한약재 도매시장이다. 이른바 ‘약전골목’으로 불리는 이곳엔 현재 한약방, 한의원, 약업사(한약도매상), 인삼전문점, 탕제원 따위의 한방 관련 업소가 350여 개나 빼곡히 늘어서 있다. 진맥하고 침놓고 뜸뜨는 일에서부터 약 짓고 달이는 일까지 한약과 관련된 모든 것이 모여 있는 ‘한약 백화점’인 셈이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탕제원에서 풍기는 한약 달이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1한약 달이는 과정을 소개한 한의약박물관 내부
한약 달이는 과정을 소개한 한의약박물관 내부

매해 5월경에 열리는 약령시한방문화축제는 이곳만의 자랑거리이다. 1978년부터 조선시대 약령시 개장 행사를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전통 한의약 축제다. 한방축제와는 별도로 1, 6일 날 열리는 한약재도매시장엔 각지에서 모여든 당귀, 구절초, 홍화씨, 두충, 산수유, 익모초, 말린 쑥, 대추, 잣, 감초, 천궁, 오미자, 독활, 황금 같은 국산 한약재 1백여 종이 경매에 나온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약초들은 거개가 자연산 약초들로 중간 상인들이 시골 장터나 산지에서 모아서 갖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한약재 값은 거개가 산지에서 직접 올라오기 때문에 시중보다 20-30% 싼 편이다. 약령시장 한켠에는 각종 한약재와 역사(변천사), 침, 침통, 약장 같은 옛 한방 의료기구, 동의보감 같은 한방관련 고서적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있다.

 

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
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

☞이야기가 있는 근대골목 투어

약령시가 있는 서성로 일대는 이른바 ‘진골목’으로 불린다. ‘역사가 긴 골목’이라는 뜻이다. 이 동네는 근대 초기 달성 서씨 부자들을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코오롱, 금복주 창업자와 정치인, 문인 등 당시 대구의 명망가들이 많이 살던 동네였다고 한다. 촘촘히 이어진 골목길은 과거와 현대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고풍스런 한옥이 있는가 하면 비까번쩍한 건물들도 키 재기 하듯 들어서 있다. 2층짜리 ‘정소아과의원’은 현존하는 대구 최고(最古)의 양옥 건물로 통하는데, 원래 서병기 씨의 저택이었다가 후에 병원으로 탈바꿈했다. 정치인, 지역유지, 문인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미도다방(1982년 개업)은 지금도 영업 중이고 드라마 ‘사랑비’ 촬영을 위해 만든 음악다방 쎄라비(현재는 카페로 운영 중)도 인기다.

골목 한쪽에 있는 제일교회는 대구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1893년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푸른 담쟁이가 기어 올라간 우뚝 선 예배당 벽은 예술작품처럼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이웃한 화교협회 건물도 고풍스럽긴 마찬가지다. 시황제, 공자, 당태종 벽화가 그려진 건물은 80년이나 되었는데도 균형미를 잃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대구 갑부였던 서병국이 1925년에 지은 저택의 일부였다고 한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략-
 

마당과 장독대가 있는 이상화 고택
마당과 장독대가 있는 이상화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상화(1901-1943) 시인의 고택도 골목길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검은색 외투에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뒷짐을 진 시인의 벽화가 눈길을 끈다. 1926년 <개벽>에 실린 이 시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시인의 치열한 시대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한 올곧은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시인의 다른 수많은 작품은 작금의 어두운 나라를 밝은 빛으로 채워줄 것이다. 이상화는 이 집에서 1939년부터 사망한 해인 1943년까지 4년 동안 살았다. 아담한 한옥으로 된 고택 마당엔 석류나무 한 그루와 우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고택에 서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 시비는 그 깊은 뜻과 함께 약소국의 아픔을 보여준다.

 

2서상돈 고택
서상돈 고택

이상화 시인 고택 맞은편에는 서상돈(1850-1913) 고택이 있다. 서 선생은 1907년 일본에 빌린 국채를 국민모금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분으로 ‘남자는 금연을 하고 여자는 은비녀를 뽑아 국채를 갚자’는 민족독립과 국권회복을 외쳤다. 조선에 강제로 차관을 받게 한 일본은 빚이 불어나 갚지 못하게 되자 침략이라는 야욕을 서슴지 않았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곧바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돼 갔다. 그 불길은 1907년 2월 22일,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되면서 더 활활 타올랐다. 그 후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강압적인 저지로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으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이라는 치욕이 어떤지를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상돈은 이 같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실업진흥을 통한 국력 배양에 힘쓰다 1913년 6월 30일, 6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청라언덕에 있는 동무생각 노래비
청라언덕에 있는 동무생각 노래비

☞독립운동의 현장

진골목은 90개의 계단이 차곡차곡 놓인 3·1만세운동길로 이어진다. 1919년 1천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계단길 끝은 청라언덕이다. ‘청라’(靑蘿, ‘푸를 청(靑)’에 ‘소나무이끼 라(蘿)’는 ‘푸른 담쟁이넝쿨이 무성한 언덕’이란 뜻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이곳에 집(사택)을 지을 때마다 구해다 심은 청라가 건물을 감싸고 오르면서 그렇게 불리게 됐다고 한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3.1만세운동길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3.1만세운동길

나이 지긋한 분들이라면 작곡가 박태준(1900∼1986)이 곡을 짓고 시인 이은상이 가사를 붙인 <동무생각>을 떠올리곤 고요한 심상에 잠길 것이다. 청라언덕은 이 ‘동무생각’이 싹튼 곳이다. 대구 계성(啓星)학교를 거쳐 1921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학부를 졸업한 선생은 1910년대 계성학교 학창 시절, 청라언덕에서 가까운 신명여자학교의 한 학생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학생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지은 곡이 ‘동무생각’이라던가. 박태준은 일제의 탄압에 맞선 작곡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숭실전문학교에 다니던 무렵 3·1운동에 동참했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대구까지 피신한 바 있으며 숭실전문학교는 그 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저항하다 결국 폐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엔 그가 다니던 계성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이 체포됐고, 교사로 일했던 마산의 창신학교는 일제에 저항하다 1939년 문을 닫았다. 음악 활동이 활발했던 1945년에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광복 후엔 한국오라토리오 합창단을 창단해 헨델의 ‘메시아’를 초연하는 등 우리나라 음악 발전은 물론 서양음악의 토대를 닦은 공로로 예술원상, 문화훈장 대통령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소파상 등을 받았다.

 

우리나라 3대 성당에 꼽히는 계산성당
우리나라 3대 성당에 꼽히는 계산성당

<동무 생각>의 무대가 됐던 대구 중구 동산동, 나지막한 청라언덕에는 지은 지 100년이 넘는 3채의 선교사 사택과 그들의 묘비가 있는 은혜정원이 있고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첨탑과 회색 화강암 외벽이 아름다운 대구제일교회가 우뚝하다. 다시 계단길을 내려오면 프랑스인이 설계했다는 계산성당(사적 제290호)이 보인다. 경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서울 명동성당, 전주 전동성당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당에 꼽힌다. 영남 최초의 고딕양식으로 된 성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옻골마을에 있는 두 그루 회화나무
옻골마을에 있는 두 그루 회화나무

☞대구의 또 다른 볼거리

둔산동에는 경주 최씨 집성촌인 옻골마을이 있다. 팔공산 자락이 부드럽게 감싸 도는 아늑한 전통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학자수 또는 출세수로 불리는 수령 350년의 회화나무 두 그루가 올곧게 서 있어 마을의 운치와 격조를 높여준다. 옻골마을은 조선 광해군 8년(1616년), 이곳에 터를 잡은 대암공 최동집 선생을 시작으로 현재 14대 종손인 최진돈(62세)씨까지 400년 가까이 마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마을 앞 회화나무 2그루는 최동집 선생의 이름을 따 ‘최동집나무’로도 불린다.

 

옻골마을에 자리잡은 백불고택
옻골마을에 자리잡은 백불고택

돌과 흙으로 마감한 마을 돌담길은 정겹기 그지없다. 돌담길 끝머리에 있는 백불종택(百弗宗宅)의 一자형 사랑채와 ㄷ자형 안채는 양반가옥의 전형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주택으로선 대구 관내에서 가장 오래됐다.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에 따라 지은 건물로 기둥 하나에도 유교적 세계관이 녹아 있다. 대문채 옆엔 최응원 선생의 호(號)를 딴 수구당(數咎堂)이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의 이 건물은 백불암이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다. 대암공 최동집 선생과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별묘와 가묘 등이 모셔진 보본당(報本堂)은 백불종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예부터 종가의 면모를 갖추려면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종택이 현존하며 종손, 종부, 지손 및 문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백불종택은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할 수 있다.

 

4불로동 고분군
불로동 고분군

옻골마을에서 가까운 불로동에 가면 초기 철기시대(서기 4-5세기)에 만들어진 200여 기의 고분을 볼 수 있다. 이 지역 토착 세력의 분묘로 알려져 있거니와 저 경주의 무덤군보다 작고 출토된 유물도 적지만 대구 분지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불로동에서 동쪽으로 2㎞쯤 가면 길 오른쪽으로 하천을 낀 향산이 나타나는데 이곳 산비탈을 덮고 있는 측백수림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김광석길에 있는 기타 치는 가수 김광석 동상
김광석길에 있는 기타 치는 가수 김광석 동상

가수 김광석을 아는가?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25여년. 중구 대봉동의 신천대로 둑방길은 이른바 김광석길로 통한다. 방천시장이 끝나는 지점으로 폭 3미터, 길이 300여 미터가 전부지만 이곳은 주말이면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대거 모여든다. 그의 노래는 사랑의 아픔으로 잠 못 이루게 하던 우리 시대 가슴들을 포근히 어루만져주었다. 허름한 골목길에 그려진, 통기타를 치면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김광석 벽화가 잔잔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기타 치는 김광석 동상과 담벼락에 그려진 대형만화, 정훈교 시인의 시 ‘벽화에 세들어 사는 남자’ 등 눈요깃거리가 한 둘이 아니다. 길 중간쯤에 수시로 음악회가 열리는 작은 야외 공연장도 들어섰다. 

<여행작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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