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은 ‘낙태의 천국’이 아니다
스웨덴은 ‘낙태의 천국’이 아니다
  • 이석원 기자
  • 승인 2019.04.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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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스웨덴은 낙태가 법으로 보장된 나라다’거나 ‘스웨덴에서는 낙태가 전면 허용된다’는 말은 팩트가 아니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낙태에 대한 포용성이 가장 강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태가 법으로 무한정 허용된 나라는 아니다.

스웨덴 여성들이 낙태의 문제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은 100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스웨덴에서 낙태가 법으로 금지되기 시작한 것은 1864년이다. 당시 베르나도트 왕조의 칼 15세가 강력한 낙태금지법을 제정한 것은 당시 여성들의 낙태 의지를 규제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낙태 강요를 금지한 것이다.

 

당시 스웨덴은 남성본위의 봉건 가부장 사회였다. 그러다보니 딸을 임신한 여성들에게 남성들이 낙태를 강요했다. 의학적 성별 감별이 아닌 무속과 종교적 신비주의에 의해 태아가 여자 아이라는 판정을 받은 가정에서 남편이나 가문에 의한 낙태가 강요되곤 했다. 또는 여자 아이를 낳는 것을 두려워 한 여성들의 낙태도 이뤄졌다.

임신 중반 이후에 이뤄진 이 같은 낙태 행위는 태아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산모까지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러다보니 임신 자체가 공포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칼 15세는 이런 풍속을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제정한 것이 낙태금지법이었고, 당시에는 낙태를 할 경우 산모 뿐 아니라 남편이 강한 처벌을 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뒤늦게 산업화가 이뤄진 스웨덴에서는 여성들이 가정의 영역을 벗어나 노동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낙태금지법은 점차 낙태 당사자인 여성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고, 여성을 사회적으로 속박하는 무기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스웨덴의 사회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여성의 인권에 대한 논의들이 이뤄졌고, 낙태 또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범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임신한 여성에 대한 기업의 차별이 낙태금지법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으로 발전된 셈이다.

1932년 집권을 시작한 사회민주노동당에 의해 낙태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리고 1938년 처음으로 낙태금지법이 완화됐다. 임신 때문에 심각한 건강의 문제가 생긴 여성만 엄격한 진단을 통해 낙태가 허용된 것이다. 아직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범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의미있는 진전이었던 셈이다.

이후 사회민주노동당의 장기 집권이 이뤄지면서 본격적인 여성의 임신과 낙태에 대한 자기결정권 논의가 촉발됐고, 이 문제는 스웨덴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진보 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가 1965년 여성을 중심으로 한 시민과 의료계, 종교인으로 구성한 낙태금지법 개정위원회가 정부에 설치됐다.

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스웨덴도 종교의 도덕적 잣대가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전통적인 가톨릭 뿐 아니라 루터교에서도 낙태의 문제는 여성의 인권이 아닌 종교적 신념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낙태금비법 개정위원회의 논의는 여러 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스웨덴 의회는 1971년 새로운 낙태법을 만들었고, 이 법은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이 법에 의해 스웨덴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할 수 있다. 임신 18주까지는 이유 불문하고 낙태가 허용된다. 18주가 지난 후 22주까지는 사회복지청(Socialstyrelsen)에서 낙태 여부에 대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하는 것이 임산부에게 위험을 출래한다고 판단하면 허가가 이뤄진다.

미성년자도 성인인 보호자의 동의를 받으면 낙태가 허용된다. 그런데 그 성인인 보호자는 꼭 부모가 아니어도 가능아다.

그러나 임신 22주가 경과한 산모에게는 낙태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낙태의 가부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청이 낙태를 허용한 경우에도 낙태 시술이 이뤄진 후 국가 서비스에 의해 전문적인 상담이 이뤄진다.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해주고, 낙태는 최후의 선택이라는 인식을 갖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스웨덴 시민이 아니어도 낙태가 가능하다. 그래서 2018년 5월 25일에야 낙태금지법이 폐지된 아일랜드나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법이 아직도 살아있는 독일에서는 스웨덴으로 원정 낙태를 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스웨덴에서 낙태가 만연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병원에서 출산을 할 때는 거의 비용을 치르지 않지만 낙태를 하게 되면 500~700 크로나(약 6만원~8만 5000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한다. 스웨덴의 주민등록번호격인 개인 번호(Personnummer)가 없는 경우에는 수백만 원에 이르는 고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66년 만에 낙태를 범죄로 치부하는 법률이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다. 낙태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보고 오랜 세월 낙태죄 폐지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이 비쳐진 것이다.

낙태죄 폐지가 상당수 시민들의 동의를 받고 있으면서도 한국 사회가 낙태죄를 계속 유지해온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 존중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지고의 가치가 ‘대립’이라는 비정상적 가치관에 얽매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의 사회도 이 문제로 오랫동안 갈등해왔다. 특히 전통적인 가톨릭의 교리가 깊게 배어있기 때문에 더 그래왔다. 하지만 잘 극복하고, ‘양립 불가능’한 고귀한 가치들을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의 영역으로 잘 안착시켰다.

낙태죄 폐지에 유감을 표한 한국의 가톨릭계도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고착시키고 남성에게 부당하게 면제하는 결정”이라고 이야기 한 만큼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가치가 인류 공통의 가치로 합쳐질 수 있는 고민은 계속 진행형이라고 보인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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