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우리가 남극을 마주하고 있구나!
드디어 우리가 남극을 마주하고 있구나!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9.04.1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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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 강진수

 

49.

칠레의 중부에 위치해 있는 산티아고에서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칠레의 남부, 파타고니아로 잡았다. 칠레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중북부에서 맨 끝까지 걸쳐 있는 매우 넓은 나라이므로 산티아고에서 파타고니아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까지 갈 교통수단을 정하는데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있었다. 여태 페루, 볼리비아,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버스를 열 몇 시간씩 타며 이동했지만, 그것은 매우 많은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오래 걸리기도 하고, 좁은 버스에서 몸을 뉘이며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비를 줄이는데 버스만한 교통수단이 없었으므로 반강제로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타고니아 중에서도 가장 먼, 남아메리카 대륙의 땅 끝에 자리 잡은 푼타아레나스까지 가는 버스 편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 푼타아레나스까지 버스를 타게 된다면 무려 24시간 넘게 걸리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남부로 갈수록 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중간에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었다가 다시 칠레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행 일정이 정해져 있는 가운데, 이렇게 많은 시간과 체력을 요하면 나중의 도시들을 여행할 때 굉장한 부담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버스 편을 포기하고 조금 비싸더라도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호스텔에서 한참 검색에 몰입한 결과, 인당 30만 원선에서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표를 구입하고 바로 다음날 일찍 산티아고 공항으로 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리고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푼타아레나스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에 출발해서 점심에 도착한다니, 그간 버스를 이용하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볼리비아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이 버스를 고집스럽게 이용하는 우리를 보며 혀를 차던 것이 기억났다. 그들이 옳았다. 돈을 써야할 때는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된다. 대신 많은 시간과 체력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푼타아레나스는 아주 작고 아담하며, 고요한 시골 마을이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운행하는 콜렉티보를 타고 쉽게 예약한 호스텔로 이동할 수 있었다. 호스텔도 마을의 분위기처럼 아담하고 고요했지만, 무척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부엌도 갖추고 있어서 바로 간단히 근처에서 장을 봐 점심을 해먹고 절약해 놓은 체력을 바탕으로 바로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파트나 고층빌딩은 찾아볼 수도 없고, 오로지 작고 예쁜 주택들과 유럽풍 건물들이 마을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잘 조성되어 있어, 걸어 다니다가 피곤하면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곤 했다. 마을이 대륙의 최남단이고 남극에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날씨는 꽤 쌀쌀했지만 아직 겨울이 닥쳐오지 않은 덕인지 걸어 다닐 만 했다. 마을도 그리 크지 않으니 걷다보니 금방 마을을 전부 둘러보고야 말았다. 산티아고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적함과 여유로움이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다. 남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바닷가에서는 작은 놀이터와 부두를 구경할 수 있었고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해도 바라볼 수 있었다. 아직 여름이 채 가지 않은 페루에서 드디어 우리가 남극을 마주하고 있구나. 불그스름하게 바다를 적시는 햇빛이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해가 모습을 감추자 금방 마을은 어두워졌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은 가로등 불과 곳곳 건물에서 켜는 전등 빛이 따뜻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가 미리 알아놓은 라면집을 겨우겨우 찾아 들어갔다. 예전에 방송에도 나온 적 있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라면집이었다. 가게가 조그만 해 꽤나 찾기 어렵지만, 세심히 건물들을 훑다보면 가게 바깥에 붙여놓은 라면 봉지와 상표들을 볼 수 있다. 나이 드신 사장님과 아드님이 가게를 꾸려 나가고 있는데, 남극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연구원과 대원들을 위해 가게를 차리셨다고 한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남극 대원들 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 여행객들 또는 중국인, 일본인 등 여러 사람들이 남겨 놓은 쪽지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한국의 향기가 나를 감쌌다.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사장님과 술 한 잔 하러 왔다며 마트에서 산 싸구려 와인을 꺼냈다. 사장님은 한 잔 드셔보시더니 이런 와인은 먹는 게 아니라며 불평을 하시고선 뜨끈뜨끈한 라면을 두 그릇 내어주셨다. 그리고 아드님이 직접 튀긴 치킨도 한 접시 가져다 주셨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있는데, ‘오스트랄’이라고. 마트에 가서 얼른 사와.” 사장님의 명을 받들고 나는 얼른 뛰어나가 맥주를 여섯 캔 사왔다. 사장님 하나, 아드님 하나, 형 하나, 나 셋. 따뜻한 음식과 술이 몸속에 들어가자 그제야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사는 이야기, 형이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사장님이 살아온 이야기. 따뜻한 대화 속에 문득 사장님의 따끔한 충고가 이어졌고 나는 그 말씀을 가슴에 담았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듣고 사장님은 어디선가 시집을 한 권 가져다 건네주셨다. “아내가 시인이야. 김경인 선생의 제자였어. 예전에 아내가 낸 시집을 줄게. 지금은 아내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아내도 자신 시집을 줬다 하면 잘 했다, 하겠지.”

“근데 글 쓰지 마. 돈 되는 일을 해. 가족도 생각해야지.” 사장님은 무심하게 시집 안쪽에 몇 자 적어주셨다. 시집 제목은 ‘신촌의 비’, 신촌이라니, 이것도 무심한 우연일까. 가게를 나서자 사장님이 우리 뒤통수에 외치셨다. “내일 다시 와서 벽에 좀 적고 가. 아침에 일출 꼭 보고.”

 

50.

우리의 다음 하루는 단조로웠다. 새벽 일찍 일출을 보러 바닷가로 나갔지만, 날씨가 흐려 결국 보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다시 라면집을 찾았다. 몇 자 적은 종이를 벽면에 붙이고 사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다음 가게를 나섰다.

부둣가로 가서 일명 ‘펭귄 섬’이라고 불리는 ‘막달레나 섬’으로 가는 페리 표를 구매했다. 금방 페리에 올랐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며 섬에 도착했다. 섬에 내리자마자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펭귄이었다. 야생 펭귄들이 섬 곳곳에 굴을 파놓고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사는 공간에 여행객들이 함부로 발을 들인다는 것이 죄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행히 펭귄들이 살아가는 섬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우리는 섬 둘레를 걸으며 펭귄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닷가에 쓸려나간 펭귄 사체와 갈매기들이 그것을 쪼아 먹는 것을 바라보다보면 나는 괜히 괴로워지곤 했다.

섬은 아주 작아서 둘레를 전부 걷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다시 페리로 돌아와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다시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옅은 보라색과 짙은 회색, 분홍색과 타들어가는 주황색. 낙조 하나에 붉은색을 제외하고도 그렇게 많은 색깔이 공을 들이는 줄 그때야 알았다. 여기 잘 왔다고, 다시 잘 가라고. 짧은 만남을 뒤로 한 남극의 태양이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나는 설핏 보았다.

 

김희재 시인에게 드리는 글귀, 다시 언젠가 사장님이 계신 라면집을 들러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

‘내가 라면을 사랑하는 것은, 해처럼 붉게 타들어 가다 떨어질 내가, 라면의 한 사리만큼도, 탱글탱글, 당신의 볼 안쪽을 건드리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면을 끓이는 사람을 사랑하고, 라면을 먹는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끓여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 먹어낼 수가 없다. 결국 라면을 사랑한다는 것은, 라면을 포함한, 모두를 사랑해내고야 마는 것과 같았다. 라면을 포함하고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 - <땅끝이라면>, 2017.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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