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한상봉 칼럼

아주 오랫동안 나의 소망은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었다. 소망이라기보다 나의 ‘로망’이라 해야 할까. 처음 결혼해서 인천 동암역 근처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여태까지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무주 산골에 살 때였다. 마당에 작약을 심고, 텃밭엔 푸성귀가 자랐다.

대숲 쪽으로 달아낸 서재는 창을 크게 내고, 구들방에서 주경야독하던 시절이었다. 이따금 새벽에야 글을 다 쓰고 마당에 나가면, 겨울산 아래 아침을 여는 새소리가 들리고 아침햇발이 따뜻했다. 경주 살 때는 길 건너 암자에서 들려오는 비구니 스님의 독경소리와 남천 너머 경주박물관에서 에밀레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아침은 시청각적으로 다가오고, 하루가 밝았고, 이내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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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장 충만하고 즐겁게

인생 뭐 있어! 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도 일산에 와서 만난 인연 가운데 인문학 하는 김경윤이 해 준 이야기는 참 무릎을 치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해마다 가족들이 모여 ‘가훈’을 새로 정하는데, 작년에는 “안 되면 말고!”였다고 한다. 올해는 이 가훈이 너무 부정적 이미지라는 평가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로 고쳤다고 한다. 사는 게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웬만큼 나이 먹은 사람들은 다 아는 진실이다. 내가 사는 게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뭔가 해봐야 하고, 그 일의 귀추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보자는 거다. 

인생 뭐 있겠는가. 내가 행복한 일을 ‘지금 당장’ 해보자는 거다. 미루지 말고 당장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해보고 싶은 일 해보자는 거다. 사사건건 노심초사 전전반측 이리저리 재지 않고 즐겁게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마음공부다. 다만 그런 삶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이기를 희망하는 것이 신앙이겠지, 생각한다.
 

나무, 아미타불

마음으로 가까이 두고 사는 김해자 시인은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아비요, 2013)는 산문집을 썼다. 김경윤처럼, 김해자처럼 자유로운 영혼은 모두 다 이상해 보인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말은 남들과 좀 다르게 산다는 뜻이겠다. 사실 성인(saint)들도 조금씩 다 이상한 사람들 아니었던가. 러시아 사람들이 경멸하면서도 존경해 왔다는 ‘거룩한 바보’들 아니던가.

성인이란 하느님 안에서 ‘참된 나’를 찾았기 때문에 그 ‘나’를 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나 없이 나를 사는 사람들이다. 김해자 시인은 이런 삶을 나무에서 발견하고 ‘아미타불’이라 불러 주었다.

산다는 건 저런 것이다
비 오면 비에 젖고 눈 오면 허옇게 얼며
천지사방 오는 바람 온몸으로 맞는 것이다
부스럼 난 살갗 부딪쳐간 자국들
버리지 않는 것이다
얻어맞으며 얼어터지며 그 흉터들 제 속에 녹여
또 한 겹의 무늬를 새기는 것이다
햇빛 따스하면 연두빛 새순 밀어올리고
뜨거운 여름날 제 속으로 깊어져
그늘이 되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도 모르는 나무는
자기도 모르게 발등 내주어 의자가 되고
장작이 되는 것이다
나무, 아미타불

_ 김해자, ‘나무, 아미타불’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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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는 “나무는 새가 오면 쫓지 않고, 가도 붙잡지 않는다. 안 온다고 안달하지도 간다고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기껏 피운 꽃에 벌이 대롱을 쑤셔 넣어도 향기롭고 달콤한 꿀을 ‘더 먹어라’, ‘다 먹지 마라’ 주문이 없다. 저와 관계 맺는 모든 것에 좋고 싫음이 없다. 결실을 미리 계산하거나 기획하지도 않는다. 아낌없이 주되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나무의 사랑법. 나무는 모든 순간에 저 자신으로 온전하게 현존한다. 여여(如如)한 나무, 그래서 나무는 여래(如來)”라고 말한다. 시인은 “필생을 다해서 도달하고 싶은 경지가 바로 저 나무”라고 하는데, 참 공부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내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오신다고 하니, 그분을 기다리면 되겠지, 안심한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하느님이 먼저 기도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러 나갈 필요가 없다. 그분이 먼저 내 집에 방문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분께 “문을 열어 드리는 것”뿐이다. 얼마나 쉬운가? 그분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시는 분이다.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가톨릭출판사, 1977)에서 루이 에블리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부르시지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성인과 우리에게 차이가 있다면, 성인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표징을 주의 깊게 받아들여 기억한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들보다 성인을 훨씬 더 사랑하셨다거나, 저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많이 베푸사, 저들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소수의 특권자’로 택하셨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똑같이 베풀고 계신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님이 필립보에게 한 말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9) 예수님처럼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늘 계셨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다. 다만 내가 그분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분이 나를 움직이도록 문을 열어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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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승낙하지 않았다면 예수님도 지상에 머물 수 없었던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손잡아 주길 기다리며 “사람에게 빌고” 계신다. 루이 에블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갈망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갈망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기도한다.”고 말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에서 울고 있을 때 “마리아야!” 하고 먼저 이름을 불러주신 분도 예수님이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요한 24,17) 하고 먼저 말을 건네신 분도 그분이시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21,5)고 말을 걸어오신 분도 그분이시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을 걸면서 대답을 기다리신다.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며 응답을 기다리신다. 우리가 이 요청에 응답하며 “예” 하고 대답할 때 그분은 구석에 자리 잡고 우리 가운데 앉아계신다.

누군가 묻고 답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분이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 분과 우정을 나누며 걷는 길은 얼마나 행복한가. 인생 뭐 있어? 하며, 그분과 아주 오래 이야기 나누길 갈망하는 삶은 이미 복되다. 천국은 그렇게 가까이 온다. 

<한상봉님은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이면서 ‘가톨릭일꾼’ 편집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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