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갈피를 잃을 때, 시는 가장 모호해진다
시가 갈피를 잃을 때, 시는 가장 모호해진다
  • 위클리서울
  • 승인 2019.04.2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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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창밖에서 너는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송승언, <녹음된 천사>, 《철과 오크》

 

서사와 순간, 플롯과 장면 사이에서 시는 가끔 갈피를 잃는다. 그러나 그런 방황은 전혀 그릇된 일탈이 아니다. 오히려 격려해주어야 할 일탈이다. 시는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장르, 장르가 아닌 장르이기에, 시가 길을 헤매는 것은 시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드러내는 대단한 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승언 시인은 자신의 시집에서 자신만이 잃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그가 헤매는 대로 헤맬 수 없을 것이다. 어떨 땐 지나칠 정도로 서정적이고, 어떨 땐 지나칠 정도로 무심한 그의 시가 어느 순간 날카로운 통찰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느낌을 받을 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송승언이라는 사람이 무서워진다. 그의 통찰이 나의 세상을 지배할 것만 같다. 내가 이토록 살아온 순간과 세상이 흑백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로부터 느낀다. 그렇게 그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 속으로 한걸음씩 들어간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뒤집어 쓸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순 없다. 그는 그이고, 나는 나다. 수많은 색깔로 드러나던 송승언의 세계는 나의 흑백으로 정리되고, 그의 이미지는 나의 것이 된다. 이게 송승언의 시가 나의 삶으로 들어오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여느 시인들보다도 부드럽게 진행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송승언은 알고 있는 것만 같고, 나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해 내 의도대로 모든 것을 재설정한다. 그의 시는 나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비로소 시가 된다. 이미지로만 흩날리던 각 연들은 퍼즐처럼 맞춰져 내 마음 속에 꼭 들어온다. 시인도 나도 방황하고만 있다.

시인은 위의 시에서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천사라고 하지만 그것은 내게 유령이다. 사후의 영혼이 유령이 되어 너의 주변을 맴돈다. 우리가 흔히 말하거나 믿는 ‘수호천사’ 같은 어떤 존재의 느낌을 주는데, 꽤나 로맨틱하다. 그러나 그 낭만이 이 시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사랑의 서정으로 시를 가득 채우기에는 시 안에 빈 공간이 많다. 그 공간을 마저 채우고 있는 것은 화자의 존재다. 내가 내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나는 다시 되살아난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나에게 묶여 있지 않은 다른 세계에서 환생한다. 여기서부터는 어떤 장엄한 의식과 믿음의 영역인 것만 같지만, 이 천사는 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보다. 천사는 천사 자신의 존재를 천사가 될 수 없는 너에게 묶어둔다. 삶과 그 바깥의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것들이라고는 창문, 블라인드, 눈꺼풀, 벽, 입뿐이다. 모두 하나 같이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 선을 좌우로 잠들지 않은 너와 잠든 나, 빛과 어둠, 눈꺼풀 바깥의 피사체들과 안쪽의 잔상, 몸과 노래, 마지막으로 물과 다른 물질이 있다. 이 모든 대립들은 경계를 포기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분명한 서사도 이유도 없다. 오직 시인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와 순간만이 공간을 지탱한다. 세계는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그 세계가 무언가에 의해 굴러가지는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 세계, 멈춘 시간과 존재 속에서 시인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천사를 상상한다. 굴레가 없는 초월적 공간에서 천사는 천사가 되기 이전의 나와 아직 잠들지 않은 너,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pixabay.com
사진=pixabay.com

시가 갈피를 잃을 때, 시는 가장 모호해진다. 하지만 모호함으로써 길고 긴 사족 없이 무한한 공간과 시간을 담아낼 수 있다. 그렇기에 방황한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이미 방황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대부분 우리는 자연스런 서사나 이미지, 어느 한 쪽에 속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삶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어떤 경우에라도 그 선택을 분명히 한다. 시가 이런 삶의 방향성을 따르지 않는 그 즉시, 시는 삶 바깥을 위한 무언가가 된다. 그 무언가는 노래든 이야기든 아니면 시 그 자체이든 모두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시가 삶과 현실을 초월했으므로 그 어떤 현실의 단어를 끌어와서라도 그 무언가와 삶 바깥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항해하는 시, 얼마나 낭만적인가. 송승언의 낭만은 사랑이 아니라 무한한 방황과 미지로의 여정으로부터 비롯된다.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니 우리는 그의 시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드러나는 느낌 자체에 집중해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느 순간 그를 따라 천사가 되고 미지의 영역을 날아다니며,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 그것을 연결시키는 나를 찾을 수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송승언의 세계는 나의 세계가 되며 미지의 영역은 선명한 꿈으로 변환된다. 꿈은 이해할 수 없다고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사라지지 않는 꿈이 점점 선명해질 때 우리는 꿈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는 단순해지고 꿈 역시 단순해진다. 삶을 초월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천사란 신이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천사를 만들었다는 신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존재하지만, 인간이 만든 천사의 형상은 그것보다 훨씬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깜깜한 것이 밝아지는 순간,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우리 눈앞에 그려지는 순간들 모두를 두려워한다. 다시 말해, 이 모든 순간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나날, 즉 미래이며 우리는 그 미래를 늘 두려워한다. 하지만 미래는 곧 당도할 현실에 불과해서, 알지 못해도 우리는 결국 미래를 살 수 있다. 초월적인 힘으로만 우리가 미래를 보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가 현재가 되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분이다. 또 내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굳건히 믿어버리기보다 저절로 내가 미래를 설계하는 순간을 받아들이다보면, 내가 생각한 나 스스로가 죽어 흩어지더라도 다시 드넓고 무한한 들과 강 어딘가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 송승언의 시는 이처럼 예언적 성격을 띠는데, 그 예언은 낭만적일 정도로 낙관적이다. 헛된 희망으로 누군가를 조종하기보다, 초월이 얼마나 어렵지 않은 일에 불과한지를 조곤이 말해준다. 시가 어떨 때는 웬만한 종교보다도 나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 그 미지의 힘이 시의 불안정함 속에서 피어난다. 갈피를 잃고 방황하는 순간, 시의 역할은 더욱더 분명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시를 여전히 읽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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