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판결의 재구성
[신간] 판결의 재구성
  • 이주리 기자
  • 승인 2019.04.2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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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지음/ 비채

 

‘김성재 살인사건’부터 ‘낙지 살인사건’까지… 우리는 ‘그 사건들’을 잘 안다. 뉴스로 보고 신문으로 읽었으며 때로는 TV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사건의 발자취를 세밀하게 따라가기도 했다. 그런데, 판결에 대해서는 어떨까? 판결은 대부분 우리의 속도보다 느리다.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갔다가 파기환송되면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이처럼 긴 여정 끝에 나온 판결이 대중의 상식과 다를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 우리의 판결은 어디쯤 와 있는가. 현직 부장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법률가이자 작가로 활동해온 도진기가 판결의 안쪽을 해부하듯 들여다본 '판결의 재구성'이 비채에서 출간됐다. 저자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판결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는 물론, 촌철살인의 비평과 읽는 재미까지 놓치지 않은 논픽션이다.

'판결의 재구성'에는 모두 서른 건의 판결 이야기가 실려 있다. 1부에서는 가장 뜨거웠던 열두 건의 사건과 판결을 낱낱이 분석한다. ‘시흥 딸 살인사건’과 ‘역삼동 원룸 사건’처럼 광기와 잔혹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은 물론, ‘김성재 살인사건’과 ‘낙지 살인사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재판 결과로 공분을 산 판결도 다루었다. 2부에서는 아홉 건의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를 둘러싼 이슈들로 눈을 넓힌다. 

‘셧다운제’와 ‘이혼 유책주의 판결’처럼 생활에 밀접한 판결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분석하기도 하고,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이 얽히고설킨 ‘훈민정음 해례본 사건’, 문학작품에 내재된 음란성을 법으로 처벌한 ‘즐거운 사라 사건’ 등을 다루었다. 3부에서는 아홉 건의 판결을 통해 판결의 내일을 내다본다. 재심 끝에 뒤늦게 진실이 밝혀진 ‘삼례 나라슈퍼 사건’과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법(태완이법)으로 이어진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등을 다루고, 판결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는 ‘앵커링 효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각 부의 말미에는 저자가 틈틈이 쓴 짧은 수필과 서평이 실려 잠시 긴장을 풀게 한다.

판사 20년, 변호사 10년. 그리고 ‘현직 부장판사 소설가’로 이색적인 데뷔를 한 이래 작가로서 보낸 10년…. '판결의 재구성'은 법률가와 작가라는, 언뜻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역할을 하며 살아온 도진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인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서문을 통해 작가 생활을 한 덕택에 판결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어느 날, 문득 판결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는데, 그 논리가 불완전하고 거칠어서 이런 논리로 올바른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는 것이다. 판결을 향해 꼬리를 문 질문들과 “그동안은 판사가 ‘우리’라고 여겼기에 무심히 넘어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 책은 시작되었다. 자료 조사에만 1년이 넘게 걸렸고, 판결문을 구해서 꼼꼼히 읽고 분석했다. 깊이 들여다본 판결의 안쪽에는 생각보다 허점이 많았다. 저자는 사건의 선정성을 전시하거나 세간의 풍문을 옮기는 대신 판결의 논리와 근거, 유무죄를 가른 추론과정을 해부하듯 들여다보기로 마음먹었다. 두 달 전 출간된, 판사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합리적 의심'도 이 같은 과정 속에서 쓰였다.

이 책의 부제는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이다. 그 유명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외침처럼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시민의 눈에는 그것이 사법제도의 가장 큰 문제인 양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시민이 법원에 호소하는 사건 대부분은 유전무죄, 혹은 정치나 진영 논리와 거리가 멀다. ‘법대로 하자!’라는 외침에는 올바른 판결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줄 거라는 믿음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판결의 안쪽을 한번쯤 들여다보고, 더 나은 판결을 위해 고민할 때라고 말한다. 판결의 논리와 상식이야말로 시민의 ‘믿는 구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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