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란 것이 다 그렇지 뭐”
“농사란 것이 다 그렇지 뭐”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9.04.25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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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왕창 핀 벚꽃을 등 지고 지푸락을...
왕창 핀 벚꽃을 등 지고 지푸락을...

여기저기 도처에 봄꽃은 피었어도 바람은 칼칼한 날 이현국씨는 고추밭 비닐 멀칭 작업에 나섰다. 허연 서리가 보기에도 어슬어슬하게 마치 무슨 얼음 장식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꽃잎 위에 앉아 있는 날이었다. 바람도 심하고 추위도 제법 몸을 떨리게 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작업을 시작했다가도 중단했겠지만, 며칠 전에 이미 날을 받아놓았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농촌에서 바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는 하다. 바람이 분다고 일을 미루고, 비가 온다고 다음날을 기약한다면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일을 감당하랴. 하지만 비닐 멀칭 작업은 사정이 영 다르다. 비닐이 무슨 장작개비처럼 묵직한 것도 아니고, 재채기만 크게 해도 훨훨 새처럼 날아가는 흉내를 내고자 하는 게 비닐이고 보니 바람이 심한 날은 이게 어지간한 솜씨로는 다루기가 어렵다.

두어 명 식구들끼리 하는 호락질만 같았어도 아침에 나갔다가 바람이 무서워서 그냥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여섯 마지기나 되는 고추밭의 비닐 멀칭 작업은 두어 명 식구들만의 호락질로는 답이 안 나온다. 깔고, 덮고, 치고, 묶고, 박고, 또 쳐야 하는 게 비닐 멀칭이니 최소한 다섯 명은 있어야 한다. 고추농사를 짓는 동네 사람 모두가 나서서 오늘은 이 집 거, 내일은 저 집 거, 하는 식의 품앗이를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실 품앗이농사만큼 능률이 배가 되는 방식도 없다. 작년에도 했고 재작년에도 했고, 매년 함께 어울려 일을 하는 동안 미운정에 고운정이 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눈빛만 봐도 저 사람이 뭘 원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를 서로가 벌써 알고 즉각즉각 응대를 해주니 일은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그냥 신명이 나기 마련이다.

 

지푸락 깔기는 쉬엄쉬엄
지푸락 깔기는 쉬엄쉬엄

비닐 멀칭은 모두가 한 곳에서 작업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띄엄띄엄 흩어져 간다. 한 사람은 비닐을 통으로 끌고 다니며 바닥에 깔고,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르며 바람에 비닐이 날리지 않도록 재빠르게 삽으로 흙을 퍼서 대충 끼얹는다. 그러면 관리기가 뒤따라가며 완벽하게 덮는다.

이 작업은 마치 센서가 아주 훌륭한 로봇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척척 맞아 떨어야지, 안 그러면 작업이 힘에 부치기도 하려니와 서로가 서로에게 지청구를 해대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돼버린다. 아 어째서 그렇게 해에? 내가 뭐 어쨌다고, 지가 잘못해놓고는. 음마마 참말로 별꼴 다 보네 잉?

다년간의 품앗이 농사로 손발이 제대로 맞춰진 사람들은 물론 이런 우세스런 풍경을 연출하지는 않는다. 가끔 초보자가 한 명 끼어들었을 경우 일이 크게 어그러져서 몇 시간씩 지체되기도 하지만, 오늘의 비닐 멀칭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숙련된 농사꾼들이어서 그야말로 척척척 맞아떨어진다.

네 명이 한 조로 구성된 팀이 바닥에 비닐을 깔고 지나가면 터널용 철사를 꼽는 사람이 뒤를 따른다. 철사가 둥그렇게 활처럼 휘어서 꽂히면 두 명 한 팀으로 구성된 노끈 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는데 이 사람들의 기술이 또한 예술이다. 둘둘 말린 노끈을 손에 들고 철사마다에 한 바퀴씩 감아 나가는데 마치 다람쥐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온 몸에 날개가 달린 무슨 새로운 종족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흙이 떡가루처럼 곱게 갈아져서 발이 푹푹 들어가고, 그래서 맨 손으로 걷기에도 불편한건만 다년간의 농사로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 그까짓 정도는 문제랄 것조차도 없다.

 

이현국씨의 말뚝박기
이현국씨의 말뚝박기

터널은 고추가 요구하는 적정 온도를 유지해 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고추 모종이 쓰러지지 않게 잡아주는 지주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만약에 터널이 쓰러진다면 고추 모종도 당연히 쓰러진다. 그래서 말뚝을 깊이 박아서 튼튼하게 잡아줘야 한다. 고추밭 주인 이현국씨는 바로 그 말뚝 박는 일을 맡았다.

비닐 멀칭 작업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아마 말뚝 박기일 것이다. 일 미터가 훨씬 넘는 쇠말뚝은 그 자체의 무게만도 솔찮다. 묵직한 쇠말뚝을 박자면 망치 또한 무거워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올리면 팔이 휘청할 정도로 무겁다. 그렇다고 가벼운 망치를 쓸 수도 없다.

가벼운 망치는 애들 장난 같아서 말뚝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무거운 망치도 한 손으로는 안 된다. 처음에는 한 손에 말뚝을 들고, 다른 한손에 망치를 들고 토닥토닥 달래고 어르기를 잠깐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말뚝이 혼자 서 있을 정도로 잡히면, 이때부터 두 손으로 망치를 들고 힘껏 내려치기를 반복한다.

덮어놓고 그냥 막 내려치는 것도 아니다. 말뚝 밑에 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니까 소망을 안고 내리쳐야 한다. 만약에 말뚝 밑에 돌이라도 있다면, 말뚝이 안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힘껏 내려쳤을 때의 반작용으로 손목이 시큰거리게 되고, 심하면 팔목 관절이 충격을 받아서 더 이상은 망치질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말뚝 박기는 작업 자체도 힘들지만 말뚝 밑에 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덤으로 무겁게 달고 다녀야 하는 이중고인 셈이다.

 

말뚝 박기가 너무 힘들어서...
말뚝 박기가 너무 힘들어서...

“아이고, 이러다가 진짜 퇴욕 나시겠어요.”

옆에서 한 마디 했더니 돌아온 이현국씨의 답이 명언이다.

“농사란 것이 다 그렇지 뭐.”

찬바람은 불어도 일하는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얼굴을 타고 목을 지나 가슴에 이르면 앙가슴이 썬뜩썬득하고, 뒷덜미에서 시작된 땀이 허리 쪽으로 흘러내리면 등짝이 썬득썬득해서 오스스 떨린다. 그래도 쉴 때는 쉬어야 한다.

말뚝을 박다가 힘이 들어서, 숨도 차고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볏짚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현국씨의 그 모습이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도 한때는 펄펄 날았건만, 내가 언제 이렇게도 쇠약해져 버렸단 말이냐.

돌아보면 비닐농법의 도입은 농사에 있어 혁명이라 할 만했다. 비닐이 등장하기 전에는 볏짚으로 온도를 높여주었다. 볏짚을 두툼하게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으면 볏짚이 썩으면서 미약하나마 열을 내는데 그 미약한 열이 작물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사용했던 방법이다. 덜 부지런한 사람은 어서 빨리 꽃샘추위가 물러나기만을 기다렸다.

 

고추모종 정식
고추모종 정식

비닐 농법이 도입되면서 고추는 오롯이 일 년 농사가 되었다. 쌀이나 보리, 콩 같은 작물은 파종에서 수확까지 육 개월도 채 안 걸리고, 감자 같은 경우는 심어놓고 석 달여여 만에 수확을 하기도 하지만 고추는 오롯이 일 년을, 아니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작년의 고춧대가 아직도 밭을 그득 채우고 있는 1월 중순에 씨앗을 파종하는 것이니, 살짝 과장을 하자면 고추농사는 일 년 농사가 아니라 일 년 반 농사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고추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는 사람은 단 사흘도 집을 비우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간단히 말해서 고추 가격은 애오라지 노동의 값 즉 품삯이다. 품삯을 제대로 받기로 하자면 고추 가격은 현재보다 세 배 이상 다섯 배는 올라야 할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1월부터 고춧대를 처리하는 시기까지의 품삯을 정부에서 고시한 최저임금으로만 잡는다 해도 일인당 금방 기천만 원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고추농사가 생각대로 다 잘 되는 것만도 아니다. 탄저병에 칼라병 등 각종 병충해는 차치하더라도, 비닐에 의존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예전에는 걱정할 일도 없었던 피해를 가끔이긴 하지만 왕창 당하기도 한다. 고추는 원산지가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추위에 엄청 약하고, 무서리만 내려도 픽픽 사그라져 버린다. 어린 모종의 경우는 두 말이 장난일 정도로 추위에 약하다.

그래서 때를 제대로 잘 맞춰야 하는데 그게 쉽기가 않다. 정식 날짜를 잘못 잡으면 느닷없이 내린 봄서리에 고추모종을 죄다 태워버릴 수도 있다. 고추농사의 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현국씨에게도 그런 경험은 있었다. 그 해의 4월 17일에 여섯 마지기 천이백 평의 밭에 고추모종을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은 아니고 다음, 다음 날 서리가 옴팍 내려서 고추모종을 깡그리 태워버렸다.

 

이것이 팀웍이다.
이것이 팀웍이다.

“아따 참말로 깝깝하더만.”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듯이 이현국씨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대며 눈을 감는다.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고추모종 정식이 다 끝났다고, 터널비닐도 다 치고 고랑에는 습도 유지용 볏짚까지 다 깔아버렸는데 그걸 도로 다 걷어내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대체용 고추모종을 구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누가 얼어죽을 것을 예상해서 예비용 모종을 기른 것도 아닐 테고, 어디의 누구한테서 그 많은 고추모종을 새로 구할 것인가. 그야말로 동분서주. 여기저기 알아볼 만한 데는 다 알아보고, 혹시라도 어디의 누가 고추모종 남았다는 소문을 들으면 즉각 알려달라는 부탁도 하고, 그렇게 해서 겨우, 간신히 알아낸 데가 저 멀리 경상남도 김해였다.

그것을 알아내서 알려준 사람이 농촌지도소의 직원이었다. 농촌이라면 전국 어디에나 있는 기술센터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서 알아낸 정보였다. 농사는 역시 네트워크가, 정보가 중요하다. 이 정보망이 보다 체계적으로 갖춰진다면 과잉생산으로 밭을 통째로 갈아엎는 비극은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을 수도 있으련만, 농업관련 예산이 쥐꼬리만해서인지 어째서인지 아직 그 경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국가 전체 예산의 십 퍼센트에 달하는 국방비의 절반만, 아니 반에 반만 투자해도 농촌이 이렇게까지 쓸쓸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노끈을 치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노끈을 치는 모습

어쨌든 그때의 경험을 밑천으로 이현국씨는 고추모종 정식 시기가 되면 자동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터진 꽃망울을 움츠러들게 하는 서리가 대번에 멈추지를 못하고 띄엄띄엄 아침이면 가끔 비치고 있으니 내일이나 모레는 분명 아니겠고, 그러면 한 열흘 더 느긋하게 기다려봐야 하는가 어쩌는가.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희소식이 들렸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나오던 날, 비가 예정된 그 전날로 정식 날짜를 확정했다.

고추 모종을 밭에 정식하는 날에도 팀 단위의 분업은 어김없이 작동된다. 비닐하우스에서 모종을 실어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어온 모종을 밭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고, 옮겨온 모종을 한 그루씩 지정된 구멍 앞에 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멍에 물호스를 넣어서 물을 주는 사람, 물이 찬 구멍 속에 모종을 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멍에 넣어진 모종을 흙으로 덮는 손이 있고, 터널용 비닐을 치는 이인 일조의 팀이 그 뒤를 따르는가 하면 터널용 비닐이 바람에 날리기 전에 흙으로 덮는 사람이 있고, 관리기를 운전하는 사람이 그 뒤를 따르면서 최종 마무리를 한다.

아, 끝났다. 중요한 일은 일단 끝났다. 끝났다는 마음에 한숨 돌리며 사방을 둘러보니 밭두렁에 벚꽃이 왕창 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현국씨는 왕창 피어 있는 벚꽃을 등지고 후속 작업에 나섰다. 호락질로 해도 충분한 이 후속작업은 생략하는 사람도 많아서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이현국씨의 고추 농법에서 보자면 이 과정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표준말로는 볏짚이라 하고, 전라도 말로는 지푸락이라고 하는 것을 고추밭 고랑에 골고루 깔아주는 일이 그것이다. 이게 왜 중요한 과정인가 하면, 청국장을 제대로 잘 숙성시고자 할 때 지푸락을 쓰고, 옛날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먹을 때 지푸락을 태워서 만든 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푸락은 그 자체가 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고 숨 차다.
아이고 숨 차다.

간단히 말해서 고추밭 고랑에 지푸락을 깔아주면 흙이 따듯해진다. 따뜻해질 뿐만 아니라 고추의 생장에 필요한 수분을 유지해 주기도 한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여름날 수분이 막 날아갈 때, 날아가는 그 수분을 잡아서 고추에게 공급하는 이를테면 수액주사 같은 역할을 지푸락이 한다고 보면 된다.

지푸락 깔기는 일도 아닐 것 같지만 생각보다 난망하다. 자칫 잘못하면 터널용 비닐이 찢어질 수도 있으니, 걸음걸이 하나도 나비를 잡으러 가듯이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몸이 긴장하고, 긴장이 지속되다 보면 땀이 빗물처럼 흐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푸락 깔기는 쉬엄쉬엄, 도대체 바빠야 할 일이 뭐냐는 투로 쉬어 가면서 해야 한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면서, 밭두렁에 앉아 잠시 하늘을 쳐다보는 이현국씨의 눈은 그윽하고, 등 뒤에서는 벚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면서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니, 그 모양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글쎄, 뭐라고나 할까.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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