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내부의 차별이 심화되면서 노동현실은 더 퇴보하고 비인간화되어버려”
“노동 내부의 차별이 심화되면서 노동현실은 더 퇴보하고 비인간화되어버려”
  • 최규재 기자
  • 승인 2019.05.02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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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거리의 변호인’ 권영국 변호사-3회

<2회에서 이어집니다.>

‘거리의 변호인’ 권영국 변호사
‘거리의 변호인’ 권영국 변호사

- 권 변호사는 젊은 시절 공장생활을 했다. 과거와 현재, 차이가 있을 법하다. 어떤 부분에서 실감하는지.

▲ 고등학교는 포항제철공고, 대학에선 금속공학을 전공해서 졸업 후 진로가 대략 정해져있었다. 금속공장에 4년간 기술직으로 있었다. 기술직이어서 현장과 긴밀했다. 제가 입사했을 때는 단적으로 잔업에 있어서 지금과 차이가 있었다. 연장근무가 본인의 동의 아래 진행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하루 처리하는 물량이 있으면 아예 배정돼서 내려온다. 그러니까 그날 근무 계획을 보면 밤을 새서라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다. 만약 급한 일이 있으면 노동자 개인이 상사에게 가서 자기사정을 얘기하고 잔업을 빼달라고 부탁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저는 그게 너무 싫어서 1년 정도 저 혼자 정시퇴근하고 홀로 투쟁했다. 우리 회사 퇴근 시간이 오후 6시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 지금은 노동조합이 확장되어서 적어도 시간외 근로나 연장근로를 하게 되면 개인이 동의해야 한다는 그런 인식이 있다. 이처럼 형식적인 변화가 생긴 건 맞다. 하지만 우리가 회사 다닐 때는 대체적으로 현장직들의 삶이 비슷비슷했다. 관리직과 현장직의 차이가 있었지만 현장에서의 차별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노동 자체의 기계화 때문에 같은 현장에서의 차이가 굉장히 구조화 돼있다. 오히려 더 퇴보한 측면이 있다. 예전에는 현장직이면 현장에서 고참이냐 아니냐 정도의 위계인데, 지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위계가 있다. 원청 정규직과 하청 정규직 밑에 재하청까지 끼어들어 그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한다. 노동 내부의 차별이 심화된 것이다. 구조적으로 불평등 문제가 훨씬 더 심화되면서 노동현실은 더 퇴보하고 비인간화되어버렸다.

 

- 사법고시에 응시하게 된 계기는.

▲ 같은 회사에서 해고를 두 번 당했다. 노조를 만들려고 하다가 해고됐고, 한번은 파업하다가 해고됐다. 두 번째 해고 후 3년간 복직 투쟁하다가, 내부적으로 노조가 약화되면서 사실상 복직이 어렵게 됐다. 실직 상태에서 선배의 추천으로 96년부터 3년간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 보통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편한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한다. 그런데 항상 길거리에서 투쟁 중이다. 어떤 계기로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는지.

▲ 회사 다니면서 노조 만들고 파업하다가 구속되었을 때, 노동을 좀 아는 변호사가 변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저는 법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법을 특별히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애초 사법고시에 응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처음 해고되고 결혼을 했다. 두 번째 해고 되고나서 아이도 생기고 생활이 어려웠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됐다. 게다가 정상적인 취업을 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합격 이후엔 막연히 언젠가 노동변호사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법연수원 수료 때만 하더라도 가족들에게 빚을 많이 져서 당장은 돈을 벌 수 있는 로펌에 들어가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괜찮은 로펌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근데 당시 민주노총에서 법률원 설립계획서 담당을 제안 받았다. 하필 로펌에 면접 보러 가는 당일이었다. 고민 끝에 로펌을 포기하고 민주노총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 이후 3주 동안 아내와 말도 안했다(웃음). 가족들 바람은 로펌에 취직하는 것이었는데, 노조를 하다가 해고되고 끝까지 싸우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이 있었기에 민주노총을 택했다. 처음엔 일반 변호사 활동을 해서 돈을 좀 모았다가 노동변호사로 가려 했는데, 순서를 바꾸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여전히 가족에게 빚을 지고 있다.

 

-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단순히 부채의식 때문에 노동변호사로 살아간다는 부분이 그렇다.

▲ 마음의 빚이라는 것은 하나의 계기는 되지만, 그게 지속될 수 있는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제 나름대로 우리사회를 바라보는 가치관이나 관점이 있기 때문에 노동변호사와 인권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활동을 계속한다? 그렇다면 체계적인 이론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거 때문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이 행복해하지 않는 사회를 계속 쳐다볼 수가 없다.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우리사회가 좀 더 인간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덜 메마르고 인간적인 사회, 누구나 좀 더 배려하는 사회, 저는 그 정도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정치까지 생각 안 한다. 제가 지금 갖고 있는 변호사 자격증으로는 거창하진 않지만 일정부분 사회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인권침해와 사회적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니까 정계진출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때문에 피해를 보고 억울하게 살아야하는 구조를 그대로 놔두고 저 혼자는 못산다.

 

-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특별히 바뀌게 된 계기가 있다면.

▲ 고향이 경상도인데, 경상도 어르신들이 꽤 보수적이다. 데모하는 학생들을 두고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한다고들 나무란다. 고교 시절만 해도 어른들 말씀이 맞는 줄로만 알았다. 81년 대학에 입학하고, 그해 4월에 최초 대학 내 시위가 발생한 것을 목격했다. 선배가 시위를 하기에 저도 도우려 뛰쳐나갔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백골단 몽둥이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선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한다고들 하는데 저렇게 피 흘리면서까지 데모를 왜 할까. 차라리 공부가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그동안의 제 사고체계가 무너졌다. 내가 모르는 현실이 여기에 있구나,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책 속에서 존경했던 분들이 현실 속에 다 있었다. 이순신을 왜 존경했느냐 하면 자신이 가장 불리한 상황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는 점에서다. 과학자인 뢴트겐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엑스레이를 발견했다. 이런 위인들의 과거는 지금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 변호사 활동과 시민사회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사회변혁을 목표로 향후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있다면.

▲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을 거부한 이유는 그 이전까지 제도정치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러 진보정당들이 서로 다 갈라져 있었다. 거기에 대한 반작용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제도정치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정당의 경우 노동당이 아마 저와 가장 맞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정치의 현실화다. 현실적인 정치를 하려면 대중적으로부터 표를 거둬야 하고 원내에 진입해야 한다. 제게 가장 잘 맞는 정당이 노동당일 수 있지만 정의당의 경우 진보로 분류되는 정당이면서도 원내 진입 확장 가능성이 있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다. 기본적으로 변호사라는 직업은 누군가 뭔가를 요구하면 그와 관련 활동하는 게 특성이다. 그래서 요구가 있으면 주로 피해자성에 주목한다. 그런 관점에서 정치를 하고 싶다. 하지만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제대로 사회를 바꾸려고 해도, 결국 제도정치에 들어가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정치권에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진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 의심들이 저를 짓누르더라도 정치는 할 것이다. 하지만 제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현실정치를 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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