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미는, 나의 여행은, 천천히 우주를 항해하고 있었다
나의 남미는, 나의 여행은, 천천히 우주를 항해하고 있었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9.05.06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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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 강진수

 

51.

다시 푼타아레나스에서 3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우리는 푸에르토나탈레스라는 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관광 마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즐기며 트래킹 하려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활기를 띤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바로 미리 예약해놓은 숙소로 갔다. 3박 4일 트래킹과 캠핑을 할 것을 준비해야 했기에, 이곳에서의 숙소는 최대한 편안히 머물 수 있는 곳으로 마련했다. 거대한 산들과 푸른 호수 앞에 위치한 숙소는 한 마음씨 좋은 칠레 아주머니, 소피아가 직접 하는 작은 민박이었다. 오랜만에 쓰는 개인 실에 우리는 살짝 들떠있었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둘이 자기에 충분했고, 화장실도 깨끗하며 온수도 잘 나온다니, 자는 곳이 어디인지가 이렇게 중요할 줄은 남미를 딛기 전까진 전혀 몰랐었다.

 

짐을 내려놓고 마을에 단 하나 있는 대형마트로 가서 실컷 장을 보았다. 캠핑을 위한 장을 보는 김에 저녁거리도 사 민박집 부엌에서 직접 해먹기로 했다. 여느 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칠레는 소고기와 와인이 매우 저렴하다. 둘이서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고기를 듬뿍 담고, 함께 구울 채소들도 한 아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곤 쉴 겨를 없이 다시 나가 캠핑 장비를 대여할 곳을 알아보았다. 3박 4일을 산 속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해야 하니 구해야 할 것이 많았다. 침낭과 텐트는 당연하고, 코펠과 버너, 가스, 수저와 식기, 작은 물 컵, 텐트 안에 깔아야 할 매트 등등. 한국에서 가져오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모두 빌려야만 했다. 다만 가격이 이래저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성수기가 아니었기에 부담할만한 정도였고, 캠핑을 하지 않고 산장을 예약하면 훨씬 비싼 숙박료가 필요하므로 이 악물고 장비들을 전부 대여해야 했다. 텐트를 치는 법은 직원이 간단히 영상을 보여줬고, 형과 나는 자신 있게 대여점을 나섰지만 나중에 우리는 그 순간을 후회했다. 텐트를 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돌아오니 벌써 해질녘, 우리는 사온 고기와 채소들을 다듬고 저녁을 만들 준비를 했다. 웬만한 취사도구나 식용유는 소피아가 기꺼이 빌려주었다. 한참을 뚝딱거리고서야 늦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한 잔 끓여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데 소피아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침 일찍 트래킹을 떠나는 우리가 아침을 못 먹을 것을 걱정해 소피아가 미리 간단한 아침거리를 준비해 방에 가져다주었다. 쌀쌀한 아침,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고 나가라며 전기 주전자와 컵들도 챙겨주니 그녀의 따스한 마음씨가 우릴 감동시켰다. 그리고 전할 말이 있다며,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그녀가 스페인어로 천천히 뭔가 이야기했다. 문제는 우리가 전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손을 휘적거리며 서로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가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무슨 전화가 우리에게 왔다는 듯 하는 그녀의 몸짓이었다.

그녀가 답답했는지 나를 데리고 전화기 앞으로 갔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수화기를 바꿔주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다행히 영어가 들려왔다. 캠핑 대여점 직원이었고 그는 형이 내일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갈 버스 티켓을 두고 갔다고 가게를 문 닫기 전에 얼른 찾아가라고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며 얼마나 아찔했는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내일 트래킹을 가는 것은 완전 무산이 될 뻔 했던 것이다. 소피아에게 연신 “그라시아스! (고맙습니다)”를 말하며 나는 얼른 가게로 갔다. 금방 티켓을 찾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캄캄한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말고는 특별할 것 없는 그 하늘이 왜인지 잊히질 않는다. 그 하늘이 있는 그 따뜻한 마을, 그 아름답고 착한 소피아를 다시 만나러 가고 싶어 그런가 보다. 그 특별할 것 없는 사람과 공간을 보고 싶어 해서 그런가 보다, 싶다.

 

52.

이른 새벽, 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짐을 추리고 소피아가 챙겨준 아침과 커피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캠핑에 필요한 짐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가방과 짐은 방에 두면 소피아가 맡아 보관해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소피아, 아직도 가끔 그녀의 기분 좋은 웃음이 떠오른다. 배낭을 짊어 메고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데 서서히 호수 너머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햇빛이 몰고 오는 따스한 공기가 우리 둘의 몸을 감싸고, 저 멀리 토레스 델 파이네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반짝거렸다. 남미에 오기 전에도 이곳에서의 트래킹은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 꿈에만 그리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기대한 것보다도 이상으로 황홀하고 감격스러우며 고되리라는 것을.

버스에 오르고 30분이 좀 지났을까,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입산 허가를 받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허가를 받고 다시 버스에 오르는데, 동쪽에서부터 트래킹을 시작하는 사람은 다른 버스를 타고 우리는 서쪽에서부터 시작하므로 같은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30분 정도 달렸을 것이다. 이미 버스 안에서부터 믿기지 않는 경관들을 눈에 담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대로 산행을 시작하면 대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것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 버스에서 내린 다음 호수를 건너기 위한 페리에 다시 올랐다. 페리 위에서 보는 청명한 하늘과 호수, 그리고 그 너머로 드리운 웅장한 산들과 숲들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예전에 이스라엘 관광객이 법을 어기고 불을 피우다가 큰 산불을 내서 모두 하얗게 타버린 나무들도 볼 수 있었다. 그 나무들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그 신비로운 모습에 경이롭기도 했다. 뭔가 신비로운 언어로 나무들끼리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 내게 저지른 짓을 봐. 나는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할 수 없어. 죽은 것들에게는 입이 없는 걸. 조용히 그들이 속삭이는 말들이 내게 죄책감을 주었다. 그리고 자연을 마주하는 한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페리에서 내리자 금방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 바로 앞에 있는 무료 캠핑장에 형과 나는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아직 점심때였기에 텐트를 펼쳐만 놓고 간단히 음식을 해먹었다. 챙겨온 빵에 치즈와 하몽(jamon; 스페인식 생 햄)을 넣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텐트를 치는 것에 매진했다. 곧 해가 떨어질 것이었기에 얼른 텐트를 완성해야 했지만, 영상을 보았다고 텐트를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상에 나온 사람은 손쉽게 치던데, 우리는 아무리 버둥거려도 텐트는커녕 간이 천막조차 만들 수 없었다. 무려 4시간을 땀 흘린 결과, 겨우 텐트 모양을 갖춘 여전히 이상한 우리들만의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해가 지고 금방 어두워지는 산 속, 우리는 공용 부엌에서 저녁을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부엌에서 텐트로 돌아오는 길, 나는 또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하늘에 별이 원래 이토록 많았던가. 형을 툭툭 건드려 조용히 하늘을 가리켰다. 형도 한참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은하수가 우리 텐트 위로 고요히 비행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속도로. 나의 남미는, 나의 여행은, 이처럼 천천히 우주를 항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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