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흰 종이배처럼
붉은 물 위를 흘러가며
나는 그것을 배웠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심장이
뜨거운 모래 위에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난다
어느 눈먼 자의 젖은 손가락을 위해

텅 빈 강바닥을 서성이던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먹을 것을 사간다
유리와 밀을 절반씩 빻아 만든 빵

진은영, <오필리아>, 《훔쳐가는 노래》

 

비극과 로맨스의 간격은 얼마 만큼일까. ‘오필리아’라는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떠올리게 한다. 그 작품 속에서의 오필리아가 겪는 비극적 소멸과 진은영의 시를 대조해서 보면, 진은영 시인이 만들어 놓은 목적 없는 간격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 알 수 있다. 사실 이 시는 햄릿의 오필리아와 관련 있다고 말할 수 없고, 혹여 시인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읽힐 수 없다. 다만 시인이 의도적으로 적어놓은 제목은 그녀의 시 전체를 완전히 일그러뜨려 비극의 거울에 비추어 보게끔 만든다. 그리고 시와 그 거울 사이엔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간격이 드리워져 있다. 시인은 왜 제목과 시 사이를 이토록 갈라놓았을까. 왜 오필리아가 떠올리는 원래의 이미지와 시에서 넌지시 던지는 새로운 오필리아는 서로 분열하고 있을까. 이쯤에서 우리는 첫 번째 줄에서의 물음이 철저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비극과 로맨스는 간격을 두려야 둘 수 없다. 그렇다고 비극과 로맨스는 한쪽이 다른 쪽을 삼키지도, 또는 둘 사이에 확연한 교집합이 있다고도 볼 수 없다. 모든 것은 우리의 착각에서 시작된다. 물음도, 비극도, 로맨스도, 우리 사이의 간격도, 둔감해지는 거리감과 서로에 대한 들끓는 모든 애정도.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진은영 시인의 가장 아름다운 면모는 이런 착각을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미지와 문장들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논리적이지 않은, 그러나 아름다운 그녀의 문장들은 우리는 손쉽게 ‘낭만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정작 낭만을 가져다 붙여주면, 그녀가 기뻐할지는 의문이다. 그녀의 비논리성은 결코 연약하고 부드럽지 않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결코 운명과 막연한 희망, 우연히 주어지는 해피엔딩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런 비장하고 섬세한 시선에서 우리는 그녀의 시가 현상을 그저 받아들이기보다 ‘나’를 통해 비춰진 묘사만을 자발적으로 수용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진은영의 사랑은 로맨스와 간격을 두고 비극에 한 발 가까이 간다. 그렇다고 완전히 비극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다. 사랑은 익사했으나, 그 익사는 하나의 기억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수천수만 번 익사했더라도 사랑은 반드시 살아남는다. 그것은 운명적인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진은영의 사랑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 선택은 사랑을 비극의 기로에서 벗어나게끔 기회를 준다.

진은영의 사랑이 비극을 등지고 다시 로맨스로 향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발성에서 비롯된다. 다시 익사할지 몰라도 심장은 해변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또 그 가까이, 모래 위에 부드럽게 솟아난다. 이런 무논리적인 회귀성을 두고 시인은 ‘눈먼 자의 손가락’을 노래한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에 그녀의 사랑은 의존한다. 흰 종이배가 되어 직접 항해했던 붉은 운명에서 화자가 배운 것은 그렇다. 운명에 삼켜지지 않고 그 붉은 혈류에 다시 달려든다. 이런 선택은 비극적 결말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선택이 이유를 전혀 달고 있지 않으므로 몰려드는 아름다움은 시인의 사랑이 낭만적이게끔 느끼게 만든다. 그게 무슨 낭만인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희생과 고통뿐인 이야기의 끝이 대체 무슨 낭만인가, 라고 불평할 수 있겠다. 변론하자면, 희생과 고통이 있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방법론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단순하게 말해, 자세와 방법의 차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마냥 희망적일 수는 없다. 사랑의 현실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인해 다각도로 변한다. 진은영이 손가락을 추앙하는 이유는 이런 간단한 삶의 진리에 있다. 그런 진리를 무논리와 비논리로 풀어내는 그녀는,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으나 이해할 수 있다. 시가 가장 싫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진=pixabay.com

그런 순간을 헤치고 나서는 화자는 어떤 반열에 오른다. 그 반열은 숭고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군가 화자에게 무언가를 사갈 수 있는 상태다. 화자는 그것을 ‘먹을 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먹을 것이 아니다. 유리와 밀을 절반씩 빻아 만든 빵이 어떻게 먹을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는 ‘먹을 것’이라는 단어가 갖는 어떤 위엄에 대한 도전이다. 빻아 놓은 유리를 사람들이 맛있게 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럼에도 강바닥을 서성이던 사람들이 그 빵을 사가는 이유는, 그런 착각을 믿기 때문이다. 화자는 알고 있다. 강바닥이 텅 비어있다는 것도, 빵이 결코 먹을 수 없는 것임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걸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착각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일부러 하려드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착각이, 사랑이 가진 익사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다시 첫 연에서 떠올리다보면, 시인이 자연스럽게 사랑의 활로를 틀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비극의 색채가 다시 짙어진다. 이쯤 되면 낭만이 거울인지, 비극이 거울인지, 혹시 사랑의 현실 자체가 거울에 비춰진 것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우리는 경계의 가운데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시를 읽고 있는 내가 화자인지, 화자를 의도한 시인인지, 화자에게 먹지 못할 것을 사가는 사람인지, 아니면 빵이 가리키는 착각 그 자체인지. 혼란이 극에 치달을 때, 시는 아무런 책임감 없이 스스로를 끝맺는다. 나는 아무런 책임감과 죄책감 없이, 사랑을 끝맺는다.

착각은 다시 착각의 꼬리를 문다. 이제는 유리가 진정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눈먼 자에게 손가락은 있는지, 살아가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익사한 기억이 없지 않은지 모든 것에 불확실해진다. 그런 불확실의 영역에서 사랑은 피어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역설을 직면한다. 착각은 스스로 그것을 착각이라고 여겨야 비로소 착각이 된다. 사랑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랑이라고 여겨야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결국 비극과 로맨스의 간격 따위는 결코 측정될 수 없다. 직감할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직감은 각자마다 다르다. 무엇을 착각이라 확신하고 무엇을 사랑이라고 구별할 수 있을까. 그 처절한 혼란 속에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나는 눈먼 자가 되고 너는 그 손가락을 적시는 강물이 된다. 떠내려 갈 수 있을 때 떠내려가고, 익사할 수 있을 때 익사하자. 사랑과 착각은 붉은 색과 흰 색의 영역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어느 쪽인가. 착각이라도 좋으니, 어느 한 쪽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시인일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막연히.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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