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태어난 뒤에 일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눈코입의 위치라든가 뒤통수의
  방향 같은 것인가
  또는 너를 기다리는 표정

  나는 정기적으로 식사를 했다. 같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였다. 갑자기 슬픔에 빠졌다.
  변성기는 지났습니다만

  저는 살인자이며 동시에
  이웃들에게 아주 예의바르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사회의 덕목,
  정중하게 넥타이를 매고 예식에 참석했다가
  취한 뒤에는 술잔을 던지고

  가로수가 언제나 거기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길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골목의 밤을 깊이 이해하였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매우 일관되었다고

  오늘도 변함없이
  죽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재자와 신비주의가 싫었어요.
  제게도 미친 듯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내가 어느 날 당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술집에서 떠들다가 문득 침울해질 것이다.
  살아가다가
  이제는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어제의 옷을 다시 입고
  오늘의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된 삶에 대하여 계속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장욱, <일관된 생애>,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삶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을 산다고 말하고, 그런 일상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일관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매번 같은 일상을 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어색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미시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똑같은 글자를 읽다가도 어느 순간 그 글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기역이 기역 같지 않고, 니은이 니은 같지 않은 때. 그때 우리는 삶이 별다를 수 있음을 직감한다. 일관성이 비틀어지고 일상이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세계가 멀어지고, 비슷하지만 다른 우주에 내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렇다. 일관성은 없고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매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항상 같은 선상에 두고 바라보려 한다. 그렇다고 다른 선상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을 수 있을까. 반대로 말하면, 삶에게 다양성 또한 없고 특별한 삶 또한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역설의 구조 속에서 이장욱 시인은 과감히 선언한다. 삶은 거짓되다고. 명료한 그의 결론에서부터 이 시를 거꾸로 읽어보자. 수많은 거짓들은 다시 하나를 가리킨다. 그 하나는 태어남과 그로 인해 생겨난 일관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이미 이 시의 시작과 끝을 모두 읽어버린 셈이다.

 

사진=pixabay.com
사진=pixabay.com

일관성은 탄생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장욱 시인이 짚어내고자 하는 변주일 것이다. 일관성은 탄생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우리 삶의 후천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눈코입의 위치’, ‘뒤통수의 방향’, ‘너를 기다리는 표정’은 삶에 있어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대체 누가 이것들을 의심하며 그 원인을 궁금해 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일상이 어느 순간 후천적임을 깨닫게 된다면, 눈코입의 위치가 태어나고 나서야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자리 잡고, 뒤통수의 방향이 그 어떤 것에 의해 정해지며, 너를 기다리는 표정 또한 너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한껏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역시 그 시작과 과정이 있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삶이라고 생각했던 일련의 흐름들은 피상적인 것 또는 오직 드러나는 결과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삶의 일관성으로부터 삶의 일관적이지 않은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이처럼 위험한 일이다. 삶의 뿌리 자체가 흔들리고, 결국엔 과연 삶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혹은 내가 과연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이런 혼란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물론 삶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그것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장욱 시인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리 역시 직관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일관성을 붙들고 살아가면 된다. 이런 삶은 결코 일관성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삶이 아니다. 이미 일관성이 선천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믿고 신뢰할만한 것이 아님 역시 잘 알고 있다. 다만 일관성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집중하기보다 만들어진 이후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렇게 그것을 붙들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삶은 단조로운 일상이 되고 일관성은 나의 전체가 된다. ‘살아가다가 살고 있지 않는’ 순간 역시 그렇다. 삶이 갑자기 멈추고 나면 우리는 모두 그 정적에 두려워한다. 누군가의 부재를 느끼게 되면 삶은 일관되지 않고 다시 흔들린다. 생애가 긋는 선이 일정하지 않고 어디선가 끊길 수 있다는 불규칙성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런 흔들림은 금방 극복되고 만다는 점이다. 아니, 극복이 아니라 무뎌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 살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일관성을 붙들고 살아간다. 다시 일상을 살고 그 누군가의 부재를 잊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말 그 누군가의 생애를 보내주는 일이다. 3주 전, 내게 글을 쓰게끔 기회를 주시고 끌어주셨던 분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멀리 바람 부는 곳에서 전해 들었다. 그 고통과 죄스러움이 나를 한동안 괴롭혔지만 이제야 비로소 일관성을 다시 붙들고 나는 산다. 드디어 고인을 보내드린다. 일관성을 벗어나 한껏 뜻하시는 바를 이루실 수 있길 고인을 위해 기도한다. 일상으로부터. 특별할 것 하나 없지만, 너무나도 특별한 나의 일상으로부터.

작고하신 정서룡 국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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