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박지후 칼럼

뉴욕현대미술관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4시면 누구나 무료입장을 할 수 있다. 뉴욕 여행 중 무료입장은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기회다. 나도 세계미술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뉴욕현대미술관의 작품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뉴욕현대미술관의 대표작품은 단연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반 고흐가 1889년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그린 작품으로, 그 당시 고흐는 환청과 환시 그리고 극심한 현기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현기증으로 인해서 그림속의 소용돌이들을 그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 빈센트 반 고흐(사진=한상봉)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 빈센트 반 고흐(사진=한상봉)

아주 작은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미술관에 입장을 하자마자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걸려있는 맨 꼭대기 층으로 갔다. 이 작품이 걸려 있는 방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발 디딜 틈 없는 사리를 비집고 들어가 본 그림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작은 갠버스에 담겨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림 속의 밤하늘은 그냥 잘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그건 우주의 기운이랄까,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파랑색과 노랑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다. 제목 그대로 밤의 하늘과 별 색깔의 찬란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림 속의 밤하늘이 반 고흐가 그리던 그 시간부터 현재까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반 고흐의 작품은 그저 잘 그린 훌륭한 그림이라기보다 그의 영혼이 깃들어져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었다.
 

하느님을 찾아서

반 고흐는 19세기 화가 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화가다. 그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의 그림을 책이나 광고 또는 인터넷 등에서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반 고흐가 살아있다면 자신은 이러한 유명세를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림을 그렸던 이유는 세속적인 성공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림은 삶 그 자체이자 종교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과 작품을 이야기 할 때 ‘하느님‘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빼 놓을 수 없다. 그의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자연히 그의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네덜란드 브라반트의 오염되지 않은 시골풍경의 기억은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절대적으로 지배했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진심과 열정을 다해 신앙심을 키웠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가톨릭, 유다교 회당까지 찾아다니며 종파를 떠나 하느님을 찾았다.

빈센트는 개인적인 신앙심에 머물지 않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 옆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편에 서기도 했다. 보리나주 탄광의 전도사 시절에 그는 노동자들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것, 나누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다. 보리나주에서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모든 걸 다 내어 주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건 멸시와 냉대뿐이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우편배달부, 룰랭 초상화 , 빈센트 반 고흐(사진=한상봉)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우편배달부, 룰랭 초상화 , 빈센트 반 고흐(사진=한상봉)

기적이 없더라도 매일같이

엔도 슈사쿠(1923-1996)는 <예수의 생애>에서 이렇게 전한다. 

“예수는 군중이 원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호반의 여러 마을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열병 환자 곁에 앉아 땀을 닦아 주었고, 아이를 잃은 엄마의 손을 밤이 새도록 꼭 쥐어 주었으나 기적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윽고 군중들은 그를 ‘무력한 남자’ 라며 호반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반 고흐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빈센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몸부림 쳤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별과 상처뿐이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정해준 길이라 그 길을 가야만 하느님과 만날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라면 미래가 불확실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뤼셀에서 시작해서 파리, 아를, 생 레미, 오베르까지 평생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가 보내 준 생활비로 빵을 살 돈도 남기지 않고 물감을 살 정도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예술가들은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한다.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하고, 자신의 작품에서 배우고 또 다시 발전한다. 반 고흐도 자기 자신을 갈고 닦으며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발전해 나갔다.
 

자연에 순종하며 사는 농부들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어릴 때부터 그의 영혼을 지배했던 하느님의 사랑은 화가 시절 그림의 소재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그림들이다. 그는 어느 화가들이 그리지 않았던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다. 그는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 프랑스)의 <만종>에 나오는 미화된 농부들과는 다른 ‘노동을 하고 있는 농부‘들의 본질적인 모습을 그렸다. 그는 농부가 땅을 파고 있거나 씨를 뿌리고 있는 장면들을 그렸다. 어느 화가들도 그런 농부들의 거칠고 어두운 모습을 그린 적이 없었다.

고흐가 그린 농부들과 자연은 하느님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은 정해진 법칙에 의해 순종한다. 인간들도 그 자연 안에서 순리를 깨닫고 살아갈 때 자연으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밤하늘의 달과 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꽃, 그 속에서 겸손하게 자연에 순종하면서 사는 농부들. 인간이 이러한 자연의 숭고한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몸부림치던 반 고흐는 생 레미에서 밤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 구름, 땅 위의 마을과 교회를 그렸다.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이다. 어둡고 고요한 마을과 달리 밤하늘은 온통 노랑 빛으로 휘황찬란하게 진동하고 있다. 고흐는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은 ‘죽음의 세계‘라 여기며 자신도 세속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 별들 중의 한 별이 되고 싶어 했었던 것이었을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에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 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이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것은 별까지 걸어가는 게 되겠지.”(1888년 6월 아를, 테오에게)

 

Biography of Vincent Van Gogh
Biography of Vincent Van Gogh

반 고흐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 오히려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난하지만 열심히 그렸고,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주님이 인도해주는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과 울부짖음에 신음하는 불쌍한 영혼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하느님의 진리를 알고 하느님의 사랑을 절절하게 살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그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꿈을 꾸게 되었다. 그는 후회 없이 그 별에 가고 싶었다. 결국,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경, 자신의 손으로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영화 <취화선>에서 주인공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이 평생 그림과 사투를 벌이다 마지막 자신의 심연 속의 깨달음을 얻고 작품과 하나가 되기 위해 활활 타오르는 가마 속으로 홀린 듯 기어 들어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자신을 태워 작품 속에 녹아들어가 예술작품을 완성시키려던 것이다. 반 고흐도 자기 자신이 밤하늘의 별이 되어 작품 속에서 화려하게 소용돌이치며 빛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뉴욕현대미술관에는 반 고흐의 영혼이 살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