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유대칠 칼럼

대구의 어느 한 대학 병원 옥상에 ‘해고 노동자’가 올랐다. 그냥 그 말이 슬프다. ‘해고 노동자’. 더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이 더운 날 뜨거운 옥상에 올랐다. 그 뜨거운 열기보다 더 힘든 무엇인가에 분노하며 그렇게 뜨거운 옥상에 올랐다. 그 이유도 참 슬프다. 노조 활동을 이유로 그들은 2007년 해고당한다. 그들의 외침도 참 슬프다. 부디 노동자를 탄압하지 말라. 그 당연한 말을 하기 위해 저 뜨거운 열기에 그저 서 있기도 힘든 옥상에 올랐다.

상식이다.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다.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본가의 눈엔 노동자가 노예로 보이나 보다. 그러나 노동자는 절대 노예가 아니다. 과거 가장 비참한 삶을 살던 이들이 노예다. 사람이 아니었다. 매매의 대상이었다. 사고 팔는 물건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기도 했다. 때론 성적 유희를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던 이들, 그 삶을 산다는기보다는 죽지 못해 지탱하던 그런 삶을 삶던 이들이 노예다.

 

by 케테 콜비츠
by 케테 콜비츠

그들에게 노동은 솔직하게 거룩한 무엇이 아니다. ‘짐’이다. 즐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죽지 못해 하는 ‘짐’이다. 당장 하지 않으면 바로 죽임을 당할지 모르니 어쩔 수가 없다. 일하지 못하는 노예는 고장 난 기계나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비참한 삶, 그 삶의 성과를 주인은 그저 누렸다. 노동하지 않고 노예의 고통을 제물로 삼았다. 너무 잘 살았다. 참 부당하고 슬픈 세상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주인’과 ‘노예’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은 누군가를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누군가를 누군가의 사용물로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누군가를 버리고 저주하는 존재일 수 없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노동자는 과거 그 슬픈 시대의 노예가 아니다. 아직 돈의 노예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본가는 노동자를 자신의 욕망을 위한 수단이나 노예 정도로 보는 것일까? 노동자를 너무 괴롭힌다. 그들은 너무나 당연히 함께 힘을 모아 자신의 이익을 지켜야하고, 당연히 주어진 권리를 지키고 이를 위하여 싸워야 하는 사람이다.

요한바오로 2세 교종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 8항은 노동자들의 결속 운동,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항상 새로운 결속 운동이 필요하다 명시하고 있다. 노조를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이를 그저 좋게 본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지지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입장이다. 한번 보자. 직접 읽어보자. 거짓말인지 아닌지 한번 읽어보자.

“교도권은 다양한 직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결사나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와 관련하여 존재하는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역할을 인정한다.”

<간추린 사회교리> 305항이다. 분명 가톨릭교회는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역사도 오래 되었다. 최근의 일이 아니다. 100년이 넘었다.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 이후 가톨릭교회는 쉼 없이 노동자가 당연히 가져야 할 사람으로의 권리, 그 당연한 권리를 옹호하는 여러 몸짓을 해왔다. 그것이 가톨릭교회다.

왜인가? 왜 그들의 권리를 그렇게 지지하고 지켜주어야 하는가? 노동조합을 통하여 자신의 권리를 소리치고 조직하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새 노예와 같은 처지로 돌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산업 재해로 그 힘든 시간을 보내도, 더불어 있지 않은 흩어진 한 명의 노동자가 외치는 외침은 작기만 하다. 자본가는 작은 외침은 그냥 무시해 버리기 쉽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 그런 모습을 우린 너무 많이 봐왔다.

노동자가 노예가 되게 그냥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가톨릭교회는 노동자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하고 부조리한 이 사회의 탐욕에 분노해야 한다. 교회 스스로 낙수효과라는 듣고 있기도 민망한 논리, 아니 자신들의 놀이의 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자본에 대한 욕심을 쉼도 없고 끝도 없다. 그 욕심에 분노하며 노동자를 지켜주어야 하는 것, 약자의 편에서 약자의 눈물뿐 아니라, 때론 분노가 되고 외침이 되어야할 교회의 의무다.

이 상식적인 이야기를 왜 또 해야 하는가? 최근 어느 지역 가톨릭병원은 오랜 시간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고 2018년이 되어서야 압도적인 찬성으로 노동조합을 위한 파업을 결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없었다는 것. 참 슬프다. 그것도 가톨릭이란 이름을 걸고 있는 곳에서 말이다. 노동조합을 지지하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가톨릭교회 사회교리인데 말이다.

사회교리는 그냥 말뿐인가? 교회의 실천, 성직자와 모든 성도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야 할 이 시대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25년 만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는 말이 슬프다. 또 어느 지역 성모병원은 직원이 대략 1800명이라지만 노동조합원은 겨우 10명이며, 12년의 긴 시간의 잔혹사가 있었다 한다. 사회교리와 너무나 떨어진 모습, 말로는 사회교리를 이야기하지만, 실상 그들이 이 땅에서 보이는 모습은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회교리는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그냥 ‘말’이다. 과거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이를 죽인 독재자가 ‘정의 사회 구현’이란 듣기 좋은 말을 한 것과 정도의 차이를 다투려 하는 것일까? 사실 가톨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의 종교 자체가 문제다. 노동자를 노예로는 그 악한 시선! 그 시선과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하는 것이 종교다. 가톨릭교회이고, 개신교회이고, 불교 등 종교이어야 한다. 말은 참 쉽다. 하느님을 사랑한다! 모두를 사랑한다! 악한 모든 욕심을 없애야 한다! 아집에서 벗어나자! 하지만 막상 희망의 빛으로 살아야하는 각자의 삶, 그 공간에선 그저 아집 가득한 사람이며 종교일 뿐이다. 종교다 별로 다르지 않다.

사회교리는 그저 말 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뜨거운 날 옥상에 오른 저 ‘해고 노동자’의 울음과 외침을 외롭게 두지 말자. 정말 종교가 부당함에 대한 분노이고 약자에 대한 사랑이라면, 자본가의 눈치를 보다 어느 순간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된 자본가가 아니라면, 저들을 외롭게 두지 말자.

기도는 그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되어야 한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된다(지혜서 6장 10절) 했다. 거룩한 것을 입으로만 하지 말자.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삶이 되고 실천이 되라 배운 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오 22장 39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이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부디 그 외로운 외침을 더 외롭게 두지 말자. 부디.

<유대칠 님은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면서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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