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 많은 비들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는 너무 많은 비들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9.07.10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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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수명,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많은 비가 내리는 계절. 그 습하고 무더운 계절에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상상한다. 우리는 어떨 때 비를 기대하고 어떨 때 기대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필요한 순간에야 비로소 비를 기대한다. 그러나 비는 결코 필요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 그 어느 것도 우리 뜻대로 이루어지는바 하나 없다. ‘나’와 ‘너’의 만남도 그렇다.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절대 영원하지 않고, 오래 지속하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가 조용히 찾아와 땅을 적시듯이 그것은 잠깐 ‘우리’에게 왔다 간다. 왔다 가지 않길 바란다. 모든 ‘우리’가 바라는 것일 테다. 하지만 장마처럼 길게 끄는 비는 ‘나’와 ‘너’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다른 때에 서로 비에 젖을 줄 알아야 하고, 왼쪽과 오른쪽이 전혀 다른 공간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적어도 이 시에서의 순간만큼은 ‘나’가 왼쪽에 서 있다. 비를 맞고 있는 입장이다. 어쩌면 비를 맞고 있기 때문에 시를 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왼쪽에서 비를 맞으며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너’를 잡고 있는 ‘나의 손’을 생각하고, 빗길과 메마른 길을 걸어온 ‘발자국’을 생각하며, 비에 젖거나 젖지 않은 ‘육체’를 생각한다. 손을 잡으며 같이 걸어가고 있지만 이들은 분명 다른 공간에서 다른 것을 보고 경험한다. 오직 잡고 있는 손만이 왼쪽과 오른쪽을 이어주는 통로인데, 여전히 비를 맞고 있는 ‘나’는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해버리고 만다. 손마저도 하나의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기억은 왼쪽과 오른쪽이 갖는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은 그 이질성을 극복하고자 두 사람이 계속 주고받은 흔적과 노력이지만, 그것 역시 너무 많아버렸다는 자책으로 다가온다. 손들이 ‘투명 가위’를 맞이한다. 그 가위는 무엇을 끊어내는가. 왼쪽과 오른쪽을 완전히 잘라내고, ‘나’는 여전히 비를 맞으며 비를 맞지 않는 ‘너’를 건너 지켜봐야할까. 비는 오로지 왼쪽을 위한 것일까. 화자는 끊임없이 비를 맞고 서있어야 할까.

 

사진=pixabay.com

이런 ‘나’의 상황은 관계에 대한 단순 갈등이 아니다. 오히려 갈등이기보단 체념과 인정의 과정을 거친다. ‘깨어나는 발자국들’을 보라. 왼쪽과 오른쪽은 다른 공간임에도 발자국들만은 나란하다. 너무 많은 손들과도 달리 발자국들은 그 짝을 맞추고 있다. 지나온 공간에 기록되어 있는 발자국은 그들의 관계가 더욱 성숙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고, 그것들이 무엇에 맞서고 있는지, 화자는 둘이 함께 걸어온 길의 시간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그 무엇들이란 길고 긴 시간동안 내린 비였음을 다음 연을 통해 알 수 있다.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은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로 변해있다. 서로를 주고받는 마음은 각자의 체념과 실망의 마음으로 변화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억지로 이으려는 관계의 끈들로 인해 그들은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각자 비를 맞는 것이다. 체념과 실망 그리고 혼란의 시간. 비의 시간을 맞서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들의 발자국이다. ‘우리’의 발자국들만이 하나 둘 깨어나고 있다.

처음엔 왼쪽과 오른쪽에 다르게 내리는 비가 이상하게만 느껴졌지만, 세 번째 연에서부터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아야 당연하다. 손에 집착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아예 육체를 뛰어넘는다. 손을 잡고 걸어가지만 그들은 손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다. 결국 서로를 반드시 붙들고 만져야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더 나아가 육체가 서로의 전부가 아님을 비로소 안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멈춰있는 육체로부터 우수수 떨어지는 ‘단추들.’ 그 ‘단추들’은 그들의 몸을 닫아놓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다고 마음껏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움은 본래 주어진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된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니, 비를 맞고 있는 화자에게 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비로부터 자유롭다. 단추들은 육체로부터 자유롭다. 너는 나의 손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도 그렇다.

지금은 왼쪽에 비가 내리지만,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기에, 다음엔 어느 쪽에 내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왼쪽에 누군가 있으면 그 반대편에도 같이 누군가 걷기 마련이다. 양쪽에 모두 비가 내리는 것보단 낫다. 하나가 메말라야 다른 하나가 촉촉한 줄 알고, 하나가 흠뻑 젖어야 다른 하나가 보송한 줄 안다. 그러니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두려워 말자. 이수명 시인이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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