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린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나를 울린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9.07.17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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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새로 들어온 녀석
새로 들어온 녀석(사진=김수복)

거꾸로 나오면 위험하다. 그 녀석은 왜 하필 거꾸로 나오다가 죽은 채로 턱 걸려야 했을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고양이의 죽음을 목도한 내 가슴이 벌렁거렸다. 눈이 핑핑 돌아서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머릿속은 하얗게 형광등이라도 돼버린 것처럼 펑펑 불꽃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내 생각이, 내 영혼이 달라져 간다는 느낌이다.

아직 날도 새기 전의 05시 즈음이었다. 그 시간쯤 밖으로 나서면 잉잉 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고양이들이 조용했다. 먹을 것을 달라고, 혹은 만져달라고, 앞으로 뒤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발에 밟히면 어쩌나 걱정을 해야만 할 정도로 부산을 떨어대던 고양이들이 그날은 이상하게도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있어야 할 녀석들이 없으니, 항상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소리가 안 들리니 나는 순간 당황했다. 얘들이 뭐야 이거, 혼잣말을 해대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고양이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동안 고양이에게 길들여져 왔던 것 같다. 사람인 내가 고양이를 길들인 게 아니라, 고양이가 사람인 나를 길들여서 그동안 자기들의 외로움과 먹을 것을 해결해 왔던 셈이다.

 

저 작은 녀석이 암컷일 줄이야.
저 작은 녀석이 암컷일 줄이야.(사진=김수복)

혹시 나는 전생이 고양이였을까? 아니면 후생이 고양이로 예약돼 있는 것인가?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 고양이의 영혼들이 잔뜩 우글거리며 나를 힐끗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이 집은 한때 고양이들이 주인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고양이들의 천국이요, 나쁘게 말하자면 고양이 소굴이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이라고, 뒤를 이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집이라고, 그래서 정나미가 떨어져서 못 살겠다고, 멀쩡한 집을 두고 마을 앞에 컨테이너를 들여놓고 거기에 살며 집은 팔아버릴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결국 팔아버리기로 했다. 그 세월이 십 년을 넘어 십이 년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인연의 끈을 좇아 이 집을 사겠다고 들어왔을 때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 하며 좌우사방으로 휙휙 달아나는 생명들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고양이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양이들과는 영 인연이 없이 살아왔던 내 입에서 절로 으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수많은 고양이들이 나를 침입자로 인식하고 힐끗힐끗 노려보며 달아나고, 달아나면서도 억울하다는 듯이, 분하다는 듯이 멈춰서서 한 번 더 노려보고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방마다 찢어진 옷가지들이 고양이털을 잔뜩 묻힌 채로 뒹굴었고, 솜뭉치가 삐죽삐죽 비어져 나온 이불도 역시 고양이들의 침대로 사용돼 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양이털 천지였다. 방바닥이며 마루 밑에는 까치나 비둘기 같은 새의 날갯죽지와 쥐꼬리들이 널려 있고, 심지어는 오래 전에 죽은 것으로 짐작되는 고양이 사체도 여기저기에 박제가 되어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이런 집에서 어찌 살겠는가 싶어 집을 아예 철거해 버릴까 생각도 했었지만, 연륜이 오래된 절간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기둥과 들보, 서까래와 문짝들이 마음에 들어 원형을 살려보기로 했다. 그때부터 고양이들과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그랬다. 고양이들은 아주 철수한 게 아니었다. 사나흘에 한 번씩, 혹은 오륙 일에 한 번씩 와서 먼지를 털어내고, 묵은 때를 닦아내고, 화장실을 설치하는 등의 공사를 진행하는 삼 년여 동안 고양이들은 내가 출근하면 홱홱 달아나고, 내가 퇴근하면 다시 와서 놀고, 자고, 사랑해서 새끼까지 낳아놓고 있었다.

 

이때 이미 임신이 됐었나 보다.
이때 이미 임신이 됐었나 보다.(사진=김수복)

얼음이 설설 얼어붙는 12월 말경이었다. 무청을 뜯어다가 말려놓은 시래기 바구니 안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굽어다보니 세상에나, 어린아이 조막만이나 한 고양이 새끼들이 다섯 마리나 고물거리고 있었다. 춥겠다 싶어 부드러운 천을 가져다가 깔아주는 등 내 나름으로는 인정을 베푼다고 베풀었지만, 다음 날 다시 와 보니 새끼는 한 마리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고양이는 누가 자기 새끼를 건드렸다 싶으면 그날로 입으로 물어서 옮겨가 버린다는 것을.

어쨌든 집수리는 끝났고, 이사를 완료한 뒤로 고양이들은 더 이상 내 집을 자기 집이라 여기고 찾아들지 않았다. 가끔 나타났다 해도 멀리서 쥐를 잡는 포즈로 힐끗거릴 뿐이었고, 내 눈과 마주치면 금방 달아나 버렸다. 그때 만약 고양이들이 나에 대한 적개심을 거두고 마당으로 쓰윽 들어와서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면 나는 그러자고 했으려나? 글쎄, 그 부분까지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하지만 새끼 고양이는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 피골이 상접한 새끼 고양이가 마당에 나타났을 때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반갑게 맞이했다. 처음 보는데도 잉잉 우는 소리를 내는 새끼 고양이가 반갑고, 고마워서 냉큼 손을 내밀었지만 잡혀주지는 않았다. 먹을 것을 줘도 사람이 옆에 가까이 있으면 다가오지 않고 일 미터쯤 밖에서 잉잉거리고, 사람이 물러서면 다가와서 먹는 새끼 고양이의 방문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한두 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새로운 새끼 고양이가 나타나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어떤 녀석은 먹을 것만 먹고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또 어떤 녀석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주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언제 그렇게 됐는지 덜컥 새끼를 낳아놓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나를, 우리를 한없이 허둥거리게 하는 녀석도 있었다.

 

배가 불러 헉헉거리는...
배가 불러 헉헉거리는 녀석(사진=김수복)

 

그나저나 이게 뭔가. 왜 이렇게도 어린 고양이들이 자꾸 들어오는가. 어느 하루 곰곰 생각해보던 끝에 발견한 단어가 고향이었다. 저 새끼 고양이는 혹시 자신의 어미와 아비가, 혹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던 곳을 찾아온 게 아닐까. 어미와 아비가, 혹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옛 시절을 들려주며 찾아가 보라고 한 게 아닐까. 아아 그래, 어쩌면 집도 절도 없이 유리걸식으로 연명하는 현재의 치욕적인 삶을 한탄하며 어른들을 원망하는 새끼 고양이들에게 어른 고양이들이 어쩌면 이런 내용의 교육을 시켜 왔을지도 모른다.

아가야, 우리에게도 한때는 천국이 있었단다. 비가 내려도 괜찮고, 눈이 쏟아져도 괜찮고, 바람이 거세가 불어도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대한 집이었지. 그런데 못된 인간들이 들어와서 우리는 그만 쫓겨나고 말았어. 아가야, 잊지 말고 새겨두어라.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의 거대한 집을, 우리의 신나는 천국을 너희는 되찾아서 누려야 해, 알았지?

그런 동화 같은 상상을 하고 난 뒤의 내 마음이 사뭇 겸손하고 엄숙해졌다. 세상사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내 돈 주고 내가 샀으니 내 집이라고만 여겨왔던 집이 정말로 나만의 집인가 하는 의문조차 들었다.

금년 봄에도 어김없이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들었다. 이번에 온 녀석은 피골이 상접하지도 않고, 상처도 없었으며, 동작이 어리어리하게 굼뜨지도 않고, 털에 윤기도 제법 있는 것이 아마 태어나자마자부터 슬픔을 양식으로 알고 살아온 게 아니라 적당한 기쁨과 도전의식을 양분으로 삼아온 것 같았다. 크기도 아주 어리지 않은 뭐랄까, 사람으로 치자면 유치원생 정도는 족히 돼 보였다.

 

거꾸로 나온 새끼 때문에 애를 쓰는
거꾸로 나온 새끼 때문에 애를 쓰는(사진=김수복)

당연하게도 나는 그 녀석의 성별이 수컷이냐 암컷이냐 하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저 먹을 것이나 챙겨 주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서 보니 암컷이었다. 이 또한 내가 알아보고자 해서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수컷 녀석이 어느 하루 그 작은 녀석의 등 위로 올라타는 것을 보고서야 어라라, 저 녀석이 암컷이었어? 했을 뿐이었다.

기가 막혔다. 저 작은 녀석의 어디에 무엇이 있다고 수컷이 올라타고 지랄인가 말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장난이려니 했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올라탐의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고, 며칠 지나서부터는 그 작은 녀석의 배가 둥실둥실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그날, 아직 날도 새기 전의 아침 5시 무렵,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만져 달라고, 밥 달라고 잉잉거리며 달려오던 고양이들이 흔적도 안 보여서 이게 뭐냐, 조금은 허둥거리는 심사로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데 다래나무 아래 애플민트 숲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고, 이어서 잉 하는 소리와 함께 임신한 녀석이 반갑게 일어서는가 싶더니 도로 그냥 주저앉고 있었다.

일어섰다가 주저앉는 녀석의 엉덩이 쪽으로 힐끗 보이는 물체가 있었으니, 직감적으로 새끼를 낳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왜 하필 저기서 저러나, 새끼 낳으라고 집도 이미 꾸며놓았거늘, 왜 애플민트 숲에서 저러는 거야? 그 녀석 참, 취향도 독특하다.

 

딸기밭에서 거꾸로 나온 녀석을 해결하고
딸기밭에서 거꾸로 나온 녀석을 해결하고(사진=김수복)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가 보니, 녀석의 자세는 새끼를 낳는 어미 고양이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진땀을 줄줄 흘리며 온 몸을 뒤틀어대는 형국이었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몸을 일으키는데, 엉덩이 쪽에서 뭔가가 덜렁거린다.

오, 저것이 무엇이냐.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가슴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오다가 중단한 새끼 고양이는 머리가 아닌 꼬리와 다리가 먼저 나와 있었다. 거꾸로든 옳게든 일단 나왔으면 꿈틀거려야 하는데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어미는 지금 아파서 미칠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한 손으로 어미의 배를 살살 긁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나오다가 중단한 새끼를 빼내려 하는데 나오지는 않고, 어미가 어느 순간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내 손을 물려하고 한다. 아, 아픈가 보구나. 이렇게 해서는 안 되나 보다, 부랴부랴 방으로 들어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새끼 고양이가 거꾸로 나오다가 죽은 채로 멈췄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는 없었다. 거꾸로 나온 새끼 고양이가 죽었다는 얘기들뿐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어미는 그새 어디론지 가버리고 없었다. 마당을 구석구석 다 돌아보고, 울타리 밖으로도 나가 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어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산후 피로에 지쳐버린 녀석
산후 피로에 지쳐버린 녀석(사진=김수복)

두 시간도 넘게 헤매다가 토방에 퍼질러 앉아 있는데 희미하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미가 새끼를 낳으라고 꾸며놓은 작은 집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달려가 보니 세상에나, 새끼 한 마리가 고물거린다. 그러니까 어미는 아마 새끼 한 마리를 낳아서 뒤처리까지 다 끝내고, 두 번째 새끼를 낳으려 하는데 그만 거꾸로 나와버려서, 그 고통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가 숲에서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단 말이냐. 새끼는 아마 그동안 잠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제 깨어났다. 왜? 보나마나 배가 고파서였을 것이다. 어미도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칭얼거리는 새끼 고양이 소리가 나를 미쳐버리게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단 사람이 먹는 우유라도 먹여보고자 우유를 사러 나갔는데 농협 마트는 아직 문도 안 열었고, 주부마트로 들어가서 우유를 달라 하니 우유가 아직 안 왔단다. 어제 팔다 남은 게 딱 하나 있다고 해서 그걸 들고 집으로 달려왔는데 딸기밭에서 낑낑 소리가 난다.

이게 뭐냐. 세상에,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어미가 딸기나무 그 작은 이파리들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아니 모로 누워서 거꾸로 나오다가 중단한 녀석을 꺼내고, 또 한 마리 새끼를 낳아놓고는 헐떡, 헐떡, 헐떡거리고 있다. 얼마나 힘을 썼던 것인지, 온 몸이 마치 무슨 거품처럼, 바람에 날리는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처럼 출렁거린다. 그런 와중에서도 인기척을 느끼고 귀를 바싹 세우는 녀석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나를 보고는 이내 부드러워진다.

 

새끼를 두고 어미는 사라졌다
새끼를 두고 어미는 사라졌다.(사진=김수복)

눈초리가 부드러워짐과 동시에 앵, 앵, 하고 우는 소리를 내는데 그것 참, 돌겠다. 와락 끌어안고 몸부림이라도 치면 내가 살 것 같지만, 그 작은 몸을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해서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죽은 새끼라도 일단 치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내미는데 이건 또 뭐냐, 어미가 거부한다. 다가오는 내 손을 앙, 하고 문다. 죽음의 냄새를 맡은 파리는 이미 시커멓게 날아와서 잔치를 벌이고자 하거늘, 어미는 온 몸을 푸들푸들 떨어가는 방식으로, 귀를 쫑긋거리는 방식으로 파리를 쫓아내며 죽은 새끼를 끌어안고만 있고자 한다. 어쩌란 말이냐.

만약에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다면, 나는 아마 실제로 돌아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시간은 흘렀고, 어미 고양이는 차츰 죽은 새끼를 인정하고 살아 있는 새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미는 지쳤다. 지칠 대로 지쳤다. 새끼를 품에 안는 것조차도 힘에 겨웠던 것인가. 젖을 먹은 새끼가 잠든 틈을 타서 살그머니 일어서더니 치자나무 밑으로 가서 혼자 몸을 눕히고 헐떡거리며 잠들어간다. 그 모양을 보는 내 마음은, 아이고, 뭔지 모르겠다. 생명이란 대체 무엇이냐, 하는 의문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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