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이미지=pixabay.com
이미지=pixabay.com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엄마는 내 이빨이 참 골치 아프다고 했다. 토끼처럼 앞니 두 개가 톡 튀어나와 있어서 보기에 따라선 귀여울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학창 시절에 그 누구도 내 이빨을 가지고 놀린 친구는 없었다. 오히려 내 머릴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는 있었다.

“뭐야. 왠지 토끼 같잖아!”

그럴 때면 나는 앞니 두 개를 입술 밖으로 꺼내 물며 토끼 코스프레로 아이들을 웃겨주곤 했다. 그러니 나에겐 이빨 열등감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나에겐 이빨 열등감을 심어주려는 엄마가 있었다.

“너 그거 빨리 교정해서 보철기 껴야된다. 정상 되려면 3년은 더 걸려!”

‘정상 되려면? 나 비정상인거야? 그런거야?’ 이러다 보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가끔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닮은 듯도 했다. 토끼와 인류 조상 사이에 진화가 좀 덜 된 내가 있었다. 거울을 보며 입술 밖으로 슬픈 이빨 두 개를 꺼내물었다.

“나 뻐드렁니가 맞는 거야 엄마?”

“그래. 넌 그런거야. 만약 니가 서세원 같은 남편을 만난다고 생각해봐라. 결혼해서 뽀뽀라도 하고 살겠니? 니가 입 튀어나온 남자 안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그러니 너라도 이빨을 빨리 집어넣어야 되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이런 어이없는 논리에 넘어가 치과를 따라간 내가 미친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는 그 말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엄마 말이 일리가 있네….”

ⓒ김양미
ⓒ김양미

대학 2학년 때. 결국 나는 치과에 가서 교정을 받았다. 앵두같이 쪼매난 내 입을 하마처럼 까벌리고 있어야 했다. 산적 주먹 마냥 커다란 의사의 손이 내 입으로 들랑달랑하더니 결국은 입 양쪽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때 내 입가에 빨간약을 발라주시며 눈물이 그렁그렁하셨던 엄마. 그러니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다지도 꼭 이빨 교정을 시키려고 그러셨던 거예요 네?

워낙 오래 전이라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꽤 오랫동안 치과를 드나들며 보철기를 끼워 넣었다. 그러다 치과에 드문드문 들리게 되었고 한 번씩 쪼여주고 점검만 받으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엄마의 우려와는 달리, 이빨이 하나도 튀어나오지 않은 한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남녀 관계가 뭐 다 그러하듯 우째우째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그 사람하고 사귀게 된 건 ‘약국에 가서 당근 찾는 토끼’ 이야기를 해준 뒤 부터였다. 토끼 흉내를 그토록 실감나게 할 수 있었던 건 물론 내 이빨 덕분이었다. 그 사람이 어찌나 미친 듯이 웃어 대던지 원.

뭐 암튼. 그 남자도 그 이빨도 이젠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가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변해버린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서 말이다.

집을 나와 금강산 가장 끄트머리쯤에 숨어있는 절로 들어갔다. 글을 쓰고자 조용한 곳을 찾아 왔노라 뻥을 치고 방 하나를 얻어 무전취식에 들어갔다. 문제는 가출 동안에 교정 치료를 받지도 정기적으로 쪼여주지도 않아 입 안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거다. 교정 철사가 여기저기 빠져버려 입안을 찔러 대고 있었지만 뭐 그러거나 말거나. 피폐해진 내 삶은 그따위 것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주지스님과 겸상을 하고 밥을 먹고 있었다. 절이다 보니 반찬이래야 콩나물이고 시금치고 시래기고 다 그랬다. 잠도 덜 깬 새벽부터 텃밭 같은 밥상을 앞에 두고 손에 걸리는 대로 대~충 집어다 입에 쑤셔넣었다. 그러다 그 사단이 나버렸다. 콩나물인지 시금치인지 길따란 뭔가가 이빨 제일 뒤쪽 보철기 고리에 꼬리를 감고 그 나머지는 목구멍으로 내려가버렸다. 아니, 내려간 것도 안 내려 간 것도 아닌 황당한 상황이었다.

쉬지 않고 딸꾹질을 10년 내리 한 느낌?

수영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바닥에 발이 안 닿는 느낌?

사랑하는 사람과 이제 막 만났는데 난데없이 설사가 삐져나오는 느낌?

잠결에 오줌 누러 나왔다가 우주선 밖으로 떨어져버린 느낌?

뭐 암튼. 일단은 숨이 안 나왔다. 쉴 수가 없었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상황파악을 못하신 스님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히 공양을 하고 계셨다. 그러다 그 소리를 들으신거다.

“코뿔소 난산하는 소리를….”

눈앞에서 얌전히 밥을 먹던 아가씨가 지 손을 목구멍에 쑤셔넣고 뭔가를 끄집어 올리는 소리를. 모습은 소리에 비하면 차라리 아름다웠다.

“꾸웩~ 꾸웩~~”

그 짧은 순간에 내가 맛 본 지옥은 순식간에 나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거지 같은 보철기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언제든 콩나물 한 가닥에도 내 목숨이 헤까닥 골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거다. 스님들에게는 차마 그 괴짓거리의 참상을 까발릴 수 없어 “지병이 좀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팔자라며 비구니의 삶을 적극 권하시던 스님들은 그 날 이후. 부모 가슴에 대못박는 자식치고 잘되는 년놈을 못 봤다며 나의 귀가를 졸라댔다. 두 번 다시 그 괴상한 소리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셨던 거다. 결국 나는, 스님들 등살에 떠밀려 집으로 돌아왔다.

치과의사는 내 입 안을 들여다보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기어코 내 입가를 다시 찢어놓았다. 집에 돌아와 보철기를 펜치로 뽑아버리겠다는 내 울부짖음이 심상치 않았는지 엄마는 다 들어가지도 않은 내 이빨에서 보철기를 떼어내게 허락해주었다. 엄마는 괜한 일을 하신 거다. 그냥 생긴 대로 살게 놔두지. 나는 서세원 같은 돌출입과 결혼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그다지 문제 될 만큼 뽀뽀가 삶의 대단한 영역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내가 예쁜 이빨로 교정되길 바랐던 엄마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그 소망은 추억으로 남아 내게 이런 글을 쓰게 했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