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김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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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은 며칠 전부터 신경 쓰이고 부담이 된다.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신발은 무엇으로 신어야 어울릴지. 액세서리는 과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본다. 수업준비도 몇 번의 연습과 되풀이 반복을 하면서 완벽에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한다.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옥죄어 올 때도 있다. 웬만큼 해서는 그들의 눈길 한 번 받기도 어렵다. 잘 쳐다보지도 않는 그들, 얘기를 해도 답이 없는 그들,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떨 때는 벽을 보고 수업을 하는 것 같기도 한 그들은 중학생이다.

처음 중학교 수업을 하게 된 계기는 딸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7년 전이다. 우연히 재능 기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1년간 중학생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무섭지는 않았다. 수업 내용을 잘 따라와 주었고 잘 웃어주기도 했다. 딸아이의 친구도 있었고 아는 선배 언니도 있어서 수업분위기가 나름 좋았다. 게다가 교무부장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께서 한 번씩 들러 아는 체를 해주시니 학생들 눈에는 꽤나 유능한 강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실 난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강사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무조건 많이 가르치는 것만이 좋은 줄 알았던 나는 두 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학생들의 고통이나 추구하는 음악세계도 무시한 채 어른들이 두드리는 동작을 그대로 가르쳤다. 친구 엄마라 뭐라 말도 못했을 것이고 선생님들이 아는 체를 하는 강사라 그저 시키는 대로 북을 두드렸을 것이다. 1년 동안의 수업과정을 마치고 학교 축제 때 난타 동아리 반은 무사히 공연을 해냈고 그렇게 나의 첫 제자들과의 추억을 갈음했다. 그 뒤로도 나는 학부모 강사라는 타이틀로 난타반 강사활동을 계속 했다. 학교 담당 선생님께서 서울시교육청 강사 인력풀에 난타 강사로 내 이름을 올려 주셨다. 본격적인 강사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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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으로 처음 수업을 진행한 학교는 서대문구에 있는 모 중학교였다. 한 학기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1학년을 대상으로 자유학기제 예술분야 난타 수업을 진행했다. 지옥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이 학교에서는 특이하게도 앉아서 플라스틱 통을 두드리는 버킷 난타 수업을 진행했다. 그간 세월이 흘러서 학생들의 성향이 달라진 이유도 있었겠지만, 청소년들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문성이 결여된 수업방식의 밑천이 드러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이원 생방송처럼 그들은 그들대로 떠들고 나는 나대로 떠들어 대는 바람에 수업을 진행하기가 무척 힘겨웠다.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두고 보면 참 예쁘고 착한데 이들이 모여서 군집을 이루면 감히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철옹성이 돼버리는 것 같았다. 그 중에는 음악적 재능을 가진 학생도 눈에 띄었지만 나는 그 학생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플라스틱 통을 두드리는 버킷 난타의 날카로운 소리가 더욱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고 그건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말이면 편히 쉬기보다 학교로 출근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 정체된 도로를 뚫고 동대문구에서 서대문구까지 출근하는 일도 점점 힘에 겨웠다. 어찌어찌해서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마지막 날 다시는 이 학교를 오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들었다. 반면 학생들에게 치여 억지로 끌고 온 것 같은 수업내용에 대한 아쉬움과 왜 이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했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한동안 교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학교 수업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고 요일이 겹친다는 둥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만들어 내면서 학교 수업을 거절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이들이 누구길래 이토록 이들이 무서운 것일까. 왜 이들과는 친해질 수 없는 것일까. 이들과 같은 연령대의 내 아이들도 무사히 키워냈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알아야겠다.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 같아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불혹을 한참 넘기고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청소년교육과 편입을 했다. 책을 펴면 잠이 오고 책을 덮으면 학습내용을 잊어버리는 힘겨운 2년의 시간은 나를 반성하기에 충분했다. 청소년의 특성과 문화, 대화법 등을 공부하는 동안 나와 갈등을 빚었던 그 때의 학생들이 이해가 되었고 심지어 개선할 수 있는 방법도 상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어른이라는 잣대만 들이대고 선생이라는 지위를 이용했다. 소통은 불통이고 지식을 밀어 넣기만 해서 그들에게도 숨 막혔을 것이다. 강사 모임이나 다른 단체에서 학생들을 대하는 교수법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다. 성인 대상과는 달리 학생들 특히 ‘중학생님’들을 대하는 자세는 남달라야 했다. 사춘기의 최고 정점을 찍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중학생 시기는 무조건 다가가기 보다는 뒤에서 관망하는 자세도 필요하고 그들의 문화를 알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했다. 사실 첫 학교에서의 강사생활은 거저 먹기였다. 학부모 강사였기 때문에 학생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미숙한 수업진행에도 웃으며 넘어가 주었을 것이다. 학교 축제 때 난타 공연을 마치고 퇴근하던 날 한 남학생의 전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김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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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덕분에 좋은 추억 만들고 너무 좋았어요. 선생님 건강하세요.”

무심하게도 이 학생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그 때 당시에는 얼굴은 생각났음) 정말 기본도 못 갖춘 선생이었다. 마지막 수업 날에는 다과 등을 준비해 쫑파티도 하고 서로 교감하는 시간도 갖는다는 다른 강사님들과는 달리 오히려 학생들에게 챙김을 받았다. 아~ 그때의 학생들 정말 미안했습니다.

올해부터 인근 중학교에서 난타 동아리반 수업을 맡게 되었다.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할 수 있을까라는 망설임이 나를 지배했다. 딸아이와 아들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너희는 어떤 강사를 제일 좋아하니?”

“아이스크림 잘 사주고 공부 적게 하는 선생님.”

이렇게 명쾌할 수가. 단맛 좋아하는 학생들을 생각해서 여러 가지 맛의 사탕과 초콜렛을 준비하고 가벼운 캐주얼 차림의 멋스러운 의상도 준비했다. 중학교 수업을 가는 날이면 화장도 신경 쓴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한 듯 안한 듯, 시계나 액세서리도 눈에 띄지 않지만 세련된 멋을 낼 수 있는 것으로 착용한다. 완벽한 수업준비를 위해서 늘 음악을 듣고 타법은 외운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이 제법 쳐다봐준다. 서로 주고받고 대화에도 끼워준다. 동작 하나를 요구했더니 창피하다며 싫단다. 예전의 나는 절대 안 된다고 밀어붙였을 텐데 이번에는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그럼 어떤 동작으로 바꾸고 싶은데?” 뒤로 돌겠단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렇게 하자고 했더니 좋아한다. 세상에나 중학생님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한 10분 수업을 한 뒤 너희들 서 있어서 힘드니까 5분 쉬자고 했더니 또 좋단다. 총 45분 수업 중 두 세 번을 쉬었더니 또 쉬냐고 물어본다. 저들도 자꾸 쉬는 게 신경 쓰이나보다. 세상에나 중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어떨 때는 어른보다 생각이 깊다. 열심히 하면 시원한 음료수를 사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하고 어려운 타법을 가르쳤다. 세상에나 우리 중학생님들 두말 않고 집중해서 순식간에 타법을 익혀버린다. 확실히 예전보다 분위기가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들이 무섭고 긴장된다. 또 그런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또 신경 쓰인다. 하지만 기대도 해 본다. 아직은 서툴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애쓴다. 분명 그들도 느껴줄 것이다. 학생들과의 수업은 북을 잘 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서로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어느 덧 한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학생들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루에 한 번씩 사진을 본다. 이들과 친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아주 가끔은 무섭기도 하지만 2학기를 마치고나면 한걸음 더 이들에게 다가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준비를 한다. 함께 축제를 마치고 1년 동안 수고했을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쫑파티를.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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