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안녕, 제주
뜨겁게 안녕, 제주
  • 김혜영 기자
  • 승인 2019.07.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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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세화에 가다-3회] 김혜영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또 제주다. 17년 여름에도 제주를 다녀와 이곳에 글을 썼는데, 올해는 봄도 여름도 아닌 날 제주에 다녀왔다. 다만 휴학을 하지 못한 4학년이 되었기에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2박 3일로 짧은 여행이었다. 시험이 끝난 주간도 아니었는데 왜 일정을 욱여넣어 먼 바다의 제주로 떠났을까. 세 편에 걸쳐 그 이유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세번째 이야기다.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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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서 친구가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의 쿠킹클래스에서 이어진 작은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친구는 뒤늦게 참석한 것이 무색하게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전 편에서 다뤘듯 자리에 동석한 손님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말로 불편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불쾌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스텝으로서 능숙하게 테이블의 공기를 조절했다. 하필 당직이었던 또 다른 스텝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거나 시골에서 자주 출몰하는 벌레들을 잡는 데에 재능이 없었고 친구는 자신의 근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웃는 얼굴로 모든 일들을 해냈다.

친구와 나는 이제 스물네 살, 평생을 학생으로 살다가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일을 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자세히 지켜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함께 대학생활을 보낸 친구가 어른이 된 것 같아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친구의 프로정신을 칭찬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은 스텝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다른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단순히 일을 하기 위해 제주에 온 것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들과 쉬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늘 스텝으로서의 책임이 우선이었다. 그렇지 못한 동료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보면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 어려울 법도 한데, 그녀는 이제 감정노동에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와 다양한 일들을 병행하며 생긴 근육인 듯 했다.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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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본래의 감정을 눌러 담고 다른 감정을 꾸며내고, 또 어떤 이는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배출하며 살아간다. 1편에서 다룬, 버스에서 고함을 지르던 할아버지는 분노에 휩쓸려 감정을 폭주시키는 사람이었다. 다 같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감정노동은 불가피한 일이고 사회화의 일부로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감정을 노동으로 지나치게 요구하는 세태는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서로 간의 예의를 지키는 일마저 노동으로 치환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은 묵힐수록 좋지 않으니 감정을 꾸며내는 것과 분출하는 것 모두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을 하다 보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 혹은 자주 봐왔지만 낯선 곳에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일상이 아닌 여행이기에 사람들과 오롯이 함께하기보다는 조금 떨어져 관찰할 수 있었고, 그들이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다양한 고민에 잠길 수 있었다. 나와 상대 모두를 위한 감정노동의 적정수준은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그리고 결국 나를 향한 고민이 꼬리를 물며 여행이 저물어갔다.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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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은 친구와 함께 제주의 감성이 가득한 장터와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며 알찬 행복으로 보냈다. 2박 3일은 예상보다 더 짧은 여정이었다. 마지막 날이 되자 하루라도 더 제주에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늘이 응답했는지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비를 동반한 돌풍이 거세게 불어왔다. 우산은 무용지물이고 아주 잠깐 밖에 나가도 속옷까지 몽땅 젖어버리는 수준이었다. 비행기가 결항이 되면 결석계를 낼 수 있지 않을까. 불순한 설렘이 가득한 마음으로 항공권을 알아보니 오전 비행기들은 결항이 되고 오후는 지연이 되고 있었다. 서울에 가면 내일 학교에 가서 뿌듯한 마음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제주에 남으면 또 여행을 하면 되기에 어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날씨와 항공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 간에 그 상황에 맞춰 여행을 이어가리라 다짐했다.

결국 비행기는 40분이 넘게 지연되었고 일단은 공항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비행이 밀린 여행객들로 가득 찬 공항은 재난영화의 한복판일 확률이 높기에 배를 든든하게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동네 식당에서 제주식 쌈밥을 맛있게 먹고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근처 바닷가에 갔다. 비 오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차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 식당에서 본 중년부부가 빗길에 차를 태워주겠다는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허름한 배낭에 우비 차림인 나는 누가 봐도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차에 탔다. 물론 언제든 경찰에 신고할 수 있게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부부는 어디서 왔는지, 어떤 숙소에 묵었는지, 바다를 좋아해서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등의 질문을 건넸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혼자 어딜 그렇게 다니느냐며 꼭 안전하게 여행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려야 할 정류장이 가까워 오래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식사를 마무리한 것처럼 속이 든든했다.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이기에 진한 아쉬움도 남았다.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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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만남은 서울로 떠나는 마지막 길목까지 이어졌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기사님을 만났다. 그는 혼자 공항에 가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며 어떻게 제주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결혼한 딸의 시댁이 제주에 있어 겸사겸사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넉살을 발휘해 딸네 부부가 거취 문제로 고민 중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는 친정과 시댁 모두 멀리 살아야 피곤하지 않다며 무조건 딸네부부의 자유를 지켜주라는 조언을 건넸다. 고민을 상담해주는 라디오처럼 정겨운 대화가 도란도란 오가고 있었다.

한 정류장에 멈춰 선 무렵, 배낭 여행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요금이 얼마인지, 함덕에 가는지를 물었다. 기사님은 요금이 3000원임을 알려주며 타면 된다고 답했고, 여행객들은 저도 모르게 ‘헉 비싼 버스구나’를 내뱉은 뒤 타지 못할 것 같다며 죄송함을 표했다. 악의는 없었지만 무례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님은 별 일이 아니라는 듯 1000원만 내고 타면 된다는 제안을 불쑥 건넸다. 자신이 이미 타라고 말했으니 어쩔 수 없다며 주저하는 여행객들에게 재차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함덕 해수욕장에 도착하자 아까 함덕에 간다고 하지 않았냐며 혹 내리는 것을 잊었는지 걱정해주었다. 버스에서 이어폰을 꽂지 않고 기사님과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처음이었다.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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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인 공항에 도착하자 기사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님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마주하며 따스한 인사를 건넸다. 자, 제주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두고 내리는 짐이 없는지 잘 살펴보시고 우산은 꼭 챙기셔야 합니다. 즐거운 여정이 되셨길 바라고 또 제주에서 만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아주머니에게 제주에 또 언제 오느냐며 제주가 아른거리면 또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도로를 달리는 작은 유토피아에 다녀온 것 같았다. 나도 이런 태도로 일을 하고 사람을 대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매일 반복되는 일과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고난, 삶을 꾸려나가느라 누적되는 피로는 우리에게서 웃음과 여유를 잃게 만든다. 그러나 무심코 건넨 친절에 누군가의 하루가 즐거워질 수 있다면, 그 따스함이 모두에게 번져나갈 수 있다면 그 행복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당장의 보상을 바라는 태도보다는 하루하루가 모여 완성되는 내 인생의 행복을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재작년 제주에서는 기사님께 폭력적인 언사를 들었던 버스에서의 시간이 가장 싫었지만 이번엔 버스에서 일어난 일들이 가장 좋았다. 먼 바다의 제주까지 와서 버스라는 좁은 실내에서 겪은 일이 가장 좋을 수 있다니. 제주는 늘 놀랍다. 몇 번째 여행인지 세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많이 와봤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풍경과 사람을 보여준다. 세화 부근의 버스 기사님들은 정류장에 사람이 있으면 클락션을 살짝 눌러주었다. 버스의 배차간격이 넓기에 누군가 실수로 버스를 놓칠까봐 한 번씩 알람의 역할을 해준 것이다. 뒤늦게 버스를 타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하염없이 기다려주고 뛰어오는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기까지 했다. 사소하지만 잠시 멈춰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일들을 보고 겪으며 제주에 지겨울 정도로 있어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주거지가 아닌 여행지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번졌다.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지각의 틀을 넓혀야 하는 순간에 또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뜨겁게 안녕,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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