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황병승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 / 문학과지성사

  - 자네는 만 레이 필름을 본 적이 있나?
  - 그렇습니다 선생님
  - 그렇다면 자네의 필름은 만 레이를 베낀 거로군
  - 그렇습니다
  - 부끄러운 줄 알게
  -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는 제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고 싶었습니다

  - 집에 불가사리를 가져오지 말아요
  - 왜지?
  - 그건 보시다시피 조금도 예쁘지 않아
  - 집에 예쁜 건 없어

  대화가 멈추자 대화가 시작되었다 침묵 속에서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

  이집트의 한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못을 먹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못을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먹어야 했다 때때로 아내와 아이들은 그것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낼 때면 남자는 상심했고 당겨진 끈처럼 분노가 치밀었다

  팽팽해진 산책로를 따라 그녀가 울부짖으며 달려 나갔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그녀가 나로부터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래, 를 말하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래그래그래그래……

  죽은 조랑말 냄새

  언덕 위에 엎드려 하루 종일 풀을 뜯고 싶다 부디 한가롭게 끈이 풀린 것처럼 언덕이 슬슬 검은 배를 보여줄 때까지

  아이들은 갑자기, 의 세계에 살면서 뛰고 달리고 소리친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끄집어내는 순간 그들은 반쯤 죽어버린다

  사라지는 것, 그렇군, 웃음은 항상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구멍 밖으로

  - 태어나는 건 역시 안 좋은 거야
  - 그러니까…… 너는 그게 싫은 거야?

  마술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꿈속에서

  피가 굳어가지

  코딱지처럼

  황병승,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 중에서, 《트랙과 들판의 별》

 

황병승이 죽었다. 친구에게 그렇다고 문자를 보내니 답장이 왔다. 무슨 감정인지 기분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슬픈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다. 이상하리만큼 차분하다. 황병승의 시를 가지고 무언가 쓴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써야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코 가지지 않지만, 그가 쓴 한줄 조차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알 수 없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마음인지, 무슨 감정인지 기분인지, 어떤 사람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런데 계속 읽게 된다니. 그는 죽고, 황병승만, 황병승의 오물만, 황병승의 축생만, 황병승의 시체만, 황병승의 냄새와 역겨움만 남아있다. 그렇다. 이는 역겨움에 대한 글이다.

 

ⓒ위클리서울/ 그래픽=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 그래픽=이주리 기자

그가 살아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한국 문학의 미래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아주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단 한 번도 미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미래라면, 그 미래는 역겨운 미래다. 하지만 미래가 아니라고 해서 역겨운 것이 금지될 수는 없다. 역겨운 것이 부정될 수는 없다. 그의 역겨움은 우리의 거울이다. 그는 거울에 우리를 비추어 보고 있다. 그가 죽고, 우리는 죽는다. 하지만 역겨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거울은 깨지지 않는다. 현실은 미래보다 무섭고, 황병승은 그가 쓴 시보다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죽고 나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인용하며 역겨운 말들을 내뱉는다. 그다운 죽음에, 그다운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있다. 우리가 있다. 만 레이가 있다. 만 레이를 베낀 누군가의 필름이 있다. 쓰고, 베끼고, 쓰고, 베끼고……,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그를 부검하게 된다면, 그 뱃속에 남은 못자국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못을 어떻게 삼킬 수 있어요? 그에게 묻는다. 목구멍으로 삼키지. 그가 말한다. 구멍이 막히면요? 그에게 묻는다. 다른 못을 삼키지. 그가 말한다. 구멍에 그것이 쌓이면요? 그에게 묻는다. 또 다른 못을 삼키지. 그가 말한다. 그의 부패한 몸을 찾아낸 사람들은 그가 마저 삼키지 못하고 방에 놓아둔 못들을 찾았을까. 그는 평생 그 못들을 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못을 나누어주고. 삼키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그는 상심하고.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 감정을 나는 도저히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나를 거울 속에서 발견한다. 못을 나누어 먹는 우리를 발견한다. 못이 역겹고 거울이 역겹다. 그의 부패한 몸을 붙드는 사람들이 역겹고 그의 부고 기사를 보고나서 담배를 찾는 내가 역겹다. 애초에 삼키지도 못하는 못은 왜 만들었을까. 삼키라고 만든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매일 못을 알약처럼 삼킨다. 고통스러워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그 고통으로 밀어 넣는다. 황병승처럼 죽으라고 죽으라고,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내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황병승이 미래라는 사람들은 틀렸다. 태어남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미래가 될 수 있을까. 현실이 죽으면 미래가 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의도치 않게 이미 정해져 있다. 그가 죽었기에 미래 역시 죽었다는 사람들 역시 틀렸다. 그는 처음부터 태어나질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살아가지 않았다. 꿈속에서 인생의 삼분의 일을 보내고. 나머지 삼분의 이는 사람의 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시(<칙쇼의 봄>)처럼 그것은 짐승의 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생이든 짐승의 생이든 그 공통점은 마술이라는 것. 그리고 굳어간다는 것이다. 모든 생의 시작과 끝이 이처럼 모호하고 무심하다. 그는 그가 바라던 바처럼 코딱지가 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이름에서 굳어버린 피를 손가락으로 파낼 수 있을까.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삶의 코딱지처럼, 그가 노래한 질병과 섹스는 여전히 역겨울까. 그를 옹호하지 않길 다짐한다. 그는 거울일 뿐, 결코 미래가 아니다. 꿈과 생의 경계처럼, 현실과 미래라는 단어가 갖는 경계는 확고하다.

황병승이 죽었다. 그리고 황병승은 죽는다. 그에 대한 애도는 이런 당연한 문장들로도 충분하다. 태어나지 않은 이가 죽었으니, 그 죽음은 생기지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런 결말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를 부검하지 않길 그 또한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가 스스로 삼킨 못들을 꺼내어, 이 못은 누구의 못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 못은 우리의 못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의 못이다. 짐승이 차마 되지 못한 그의 생이 사람의 언저리에 남아 마감해서, 다행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 참 다행이다. 그러니 잘 가시라. 어쨌든 잘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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