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위클리서울=박석무] 며칠 전 5·18 투사 한 사람이 백혈병으로 고생하다가 끝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자 곧장 빈소로 찾아가 영위 앞에서 소리 없이 울다가 왔습니다. 1980년 방년 20세의 나이로 대학교 1학년생이던 이연 군은 계엄군이 양민을 학살하는 참극을 목격하고 치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바로 나눠주는 총을 들고 시민군에 합세하여 포악한 계엄군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5·18광주항쟁에 몸을 던져 싸웠던 이 군은 5월 26일 저녁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YWCA를 사수하려고 밤새 총을 들고 입구를 지켰습니다. 

 

박석무 ⓒ위클리서울
박석무 ⓒ위클리서울

27일 아침 생포된 이 군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죽을 고생, 온갖 고문과 짓밟힘을 당하며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듣고 그의 영전에 바친 그의 선배 안길정 군의 애도사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찢어지게 해줍니다. “그리고 상무대 영창 5소대, 바람 한 점 없는 그곳, 마루독이 창궐하여 허벅지 살이 물러터지고, 샅거웃에 옴이 번져 곱징역을 살았던 그해 여름, 두환이 말단 졸개 중사의 독기가 놋쇠 뚜껑처럼 솥단지 감방을 눌러댔었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정량 배식을 요구했더니 형무 반장 중사는 몽둥이로 답했었지…” 

안길정 군이 이연 군의 영전에 바치는 애도사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 군은 광주에서 대학은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서강대를 다녔습니다. 주간지 기자도, 학원선생도 하면서 성하지 못한 몸을 이끌면서 온갖 잡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군의 장형과 누나도 감옥쟁이, 셋째 형도 감옥쟁이, 집안은 모두 투사들로 구성된 집안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내내 불온 가족의 불량분자로 낙인찍혀 늘 감시와 경계를 받아야 했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으리라는 것은 짐작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군의 장형(이강)은 나의 고교·대학의 후배로 두 차례나 나와 함께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옥우(獄友)여서 그의 아우들 또한 나의 아우들로 여기며 한 집안처럼 살아온 처지였습니다. 최근에는 이 군의 셋째 형도 역시 투사인데 중병으로 여생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천도(天道)란 있는 것이며, 하느님은 또 있는 것인가요. 왜 그렇게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가족들에게는 그런 혹독한 불행만 가져다주는 것인가요. 

다산은 말했습니다. 위정자들이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牧民者有四畏 下畏民 上畏臺省 又上而畏朝廷 又上而畏天:「送富寧都護李鍾英赴任序」).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헌법을 깔아뭉개며 강제로 부당하게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일어선 광주의 양민들을 학살한 반역자들은 백성과 하늘을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선량한 백성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아 부귀호강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때의 희생자 이연 군은 이제 겨우 5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희생자들에게 온갖 욕설이나 퍼붓는 국회의원이나 그 동조자, 그들은 하늘과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잘만 살아가고 있으니, 그래도 되는 건가요. 아까운 나이에 고문과 징역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이연 군, 지상의 힘없는 선배는 삼가 그대의 명복을 빌고 있을 뿐입니다. “이 군 잘 가시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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