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전주국제영화제 탐방기-1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언젠가부터 졸업과 취업 얘기로 글을 시작하고 맺는 습관이 생겼다. 모두가 다 아는 사회적 문제를 반복해서 거론하는 것에 지루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당사자로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은 욕구와 필요를 느낀다.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취업과 진로에 관한 고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글에 담길 것이다. 누군가를 대표할 자격은 없지만 요즘의 20대, 대학생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번 편은 전주국제영화제 기획으로, 영화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이유부터 졸업반이 된 대학생의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가려 한다.

 

회의 중인 연시 사람들
회의 중인 연시 사람들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많은 이들이 환희에 가득 차 2019년을 맞이할 무렵, 나는 계절학기를 들으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랬다. 이제 정말 ‘사망년’이라 불리는 4학년이 되었구나. 근 몇 년간 얼른 졸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막상 끝이 다가올수록 아쉬운 마음이 커져만 갔다. 어느덧 직장인이 된 선배들은 학생일 때가 좋다는 말을 반복했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던 해묵은 이야기도 또래를 통해 들으니 이상한 파급력이 있었다. 갑자기 불평과 불만의 집합체였던 학교에 애정이 생기고 매일 거닐던 캠퍼스가 새삼 아름다워 보였다. 정말 이대로 졸업이란 말인가. 지금껏 살아온 날 중 대부분이 학생이었기에 학생이 아닌 내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학교를 다닌 5년여의 시간은 꽤나 격동적이었다. 시작을 하면 끝을 봐야겠다는 성미 때문에 학생회도 총 단위까지 경험해보았고 교내 언론에서도 편집장의 자리까지 맡아보았다. 봉사, 동아리, 학생자치단체 등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도전한 값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목적과 목표가 이미 정해진 단체에 소속되는 것은 좋은 부품으로 기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주체성을 갖고 해나갈 수 있는 일은 늘 인력과 자원이 부족해 고강도의 노동을 하고도 지속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수의 노력만으로 학생사회가 죽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극복할 순 없었다. 결국 모든 활동에서 졸업을 선언했지만 막상 4학년이 되니 학생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아쉬움이 남지 않는 활동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아쉬움이 남아도 어때, 마지막인걸. 그때 글쓰기 다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일이 떠올랐다. 흔쾌히 지갑을 열고 꼬박꼬박 챙겨보는 것, 아무리 피곤해도 어떻게든 찾아보는 것, 영화였다.

 

정기상영 기획
정기상영 기획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학교에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활동했다는 소문이 있는 영화 동아리도 있고 영화를 제작하는 유명한 동아리도 여러 개 있다. 다만 4학년이 선택할 수 있는 동아리는 많지 않다. 보통 신입생을 뽑아 교육을 시키고 다음 세대의 활동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고 나조차도 1학년의 열정과 패기를 기대하는 곳은 부담스러웠다. 공부와 졸업, 취업준비는 0순위에 해당하는 일이고 동아리는 어디까지나 취미와 공동체 생활을 위한 활동이었다. 그렇게 소심한 마음에 꼭 들어맞는 동아리가 하나 있었는데, 학교 도서관 산하 기구 ‘연시’였다. 보통의 동아리들은 신입을 모집하는 글에서 필수 조건을 여러 개 제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할 수 없게끔 으름장을 놓는 경우가 많다. 요즘의 대학생은 아르바이트, 공부, 취업 준비 등 할 일이 너무 많아 대단한 다짐 없이는 성실하게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시의 모집 글은 달랐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보고 싶은 사람들,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시작해 “말랑말랑한 감수성, 영화에 대한 생각이 익어가는 곳”과 같은 부드럽고 여유로운 이야기만 적혀 있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음주만을 즐기거나 여러 사업을 펼쳐놓고 실무의 늪에 몰아넣는 곳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한다는 단순한 목적을 열심히 지키는 느낌이었다.

모집 대상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지만 괄호에 “고학번의 내공, 새내기의 신선함 모두 환영합니다”라는 따스한 문장까지 적혀있었다. 교내외 모든 단체를 통틀어 고학번을 환영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지원서를 한 숨에 써내려갔고, 졸업을 앞두고 좋은 추억을 꼭 남기고 싶다는 말까지 구구절절 보탰다. 그렇게 들어간 동아리는 내가 기대한 것 그대로의 공동체였다. 가장 생경했던 것은 단체 이름인 ‘연시’를 사람을 부를 때도 종종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나를 이름이 아닌 단체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곧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소속감을 진하게 느꼈다. 모든 사람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 공동체가 나이와 학번 같은 위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신입생부터 졸업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도 처음 만났을 때는 상호 간에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다. 말을 편하게 하고 싶을 땐 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하고, 서로 마음이 맞을 경우에만 함께 반말을 사용한다. 이미 5개월이 넘게 활동을 한 지금도 대부분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그저 모두가 친구이고 연시일 뿐이다.

 

정기상영 포스터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정기상영 포스터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정기상영 포스터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좋은 공동체를 찾았다는 설렘을 잔뜩 늘어놓느라 정작 무슨 일을 하는 동아리인지는 아직도 설명하지 못했다. 사실 연시는 학교 도서관에 속한 기구이지 동아리는 아니다.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다는 점에서 동아리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학교 도서관 산하 기구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현재 재학 중인 학교의 도서관엔 작은 극장과 시청각 자료들을 관리하는 멀티미디어 센터가 있다. 오래된 무성영화부터 따끈따끈한 신작까지 모두 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학교의 자랑거리다. 이에 속한 연시는 학생들이 직접 영화를 상영하고 추천하기 위해 탄생했다. 매주 회의를 통해 관객과의 대화, 정기 기획전, 옥상영화제 등을 준비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자유롭게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일들을 한다. 영화를 추천하고 리뷰하는 것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기준으로 묶어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은 어디서도 해볼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특히 옥상영화제는 날이 좋은 가을에 도서관 옥상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가장 큰 행사이다. 하늘의 별과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이 축제는 해마다 많은 학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옥상영화제만큼이나 많은 인원이 애정을 갖고 참여하는 행사가 있는데, 바로 국내 영화제 탐방이다. 5월 초에 열려 연휴와 겹치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대표적인 행사이고, 그 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희망하는 인원이 자유롭게 다녀온다. 영화 동아리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도 영화제였다. 전국에서 관광객과 영화인들이 모여드는 기간에는 숙소를 구하기 어렵고, 야외 상영작들은 필연적으로 늦은 시간에 열려 홀로 돌아다니기엔 위험부담이 있다. 이때 동아리는 매번 영화제를 참석해온 만큼 단골 숙소가 정해져있고 경험이 많은 선배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노하우도 많다. 특히 배낭을 메고 먼 곳까지 와서 인기가 많지 않은 다양성 영화를 함께 보는 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된다. 덕분에 올해는 연시와 함께 전국의 영화제 제패를 결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전주국제영화제와 정동진독립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다녀왔다. 다음에 소개할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영화제 탐방기를 본격적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다양성 영화에는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영화제 영업기, 아니 영화제 탐방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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