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은주의 영화
[신간] 은주의 영화
  • 이주리 기자
  • 승인 2019.08.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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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지음/ 창비

[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아픔을 가로지르는 생생한 입담으로 우리 사회 소외된 이웃을 보듬어온 작가 공선옥이 '명랑한 밤길' 이후 12년 만에 신작 소설집 '은주의 영화'를 선보인다. 표제작인 중편소설 '은주의 영화'를 비롯,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발표한 작품 8편을 묶은 이번 소설집은 약자의 아픔을 농익은 필치로 풀어내는 솜씨가 여전하거니와 옛 가족이 해체되며 느끼는 불안과, 폭력의 시대가 여성에게 남긴 상처,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고독을 공선옥 특유의 활달한 서사로 들려준다.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28년, 우리 시대의 모순을 정면으로 돌파해온 작가는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 야만의 시대가 남긴 상처, 그 속에서 침묵을 깨고 피어난 이야기는 공선옥 소설의 활력을 다시금 증명해낼 것이다. 

표제작 '은주의 영화'는 영화감독이 꿈인 취업준비생 은주가 카메라 한대로 이모의 이야기를 촬영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광주에서 대구탕집을 하는 이모는 5·18 때 어떤 장면을 본 이후로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카메라를 통해 그런 이모의 이야기를 무심히 듣던 은주는 어느새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은주가 되어버린 카메라 앞에서 이모는 남성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놓였던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다. 카메라는 마치 영매처럼 죽은 사람까지 불러들이는데, 종내에는 이모와 은주가 얽힌 한 소년의 비극적인 죽음이 떠오르고 그 소년의 죽음이 1989년 실제 있었던 조선대 학생 이철규의 의문사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침묵함으로써 감춰두었던 각자의 상처는 영매가 되어버린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가 되고 한바탕 울음이 된다. 

폭력의 시대에서 학대받은 여성은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 '읍내의 개'에도 등장한다.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의 언니는 남의집살이, 버스 차장,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번 돈으로 집에 소를 사주지만 소는 병들어 죽고 결국 언니도 병들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엄마와 언니가 병원에 있느라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아직 어린 ‘나’는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다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고 허공을 향해 엄마를 불러보지만 응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읍내의 개'에는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려는 ‘나’가 읍내 차부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식을 라디오 뉴스를 통해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공선옥은 ‘작가의 말’에서 “내가 스무살을 향해 가던 무렵 세상에는 ‘큰 개’ ‘작은 개’들이 곳곳에서 ‘발광’을 했다”라고 그 시대를 떠올린다. 

'순수한 사람'은 착취당하는 어머니의 삶이 세대가 지나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땅도 집도 소도 전부 자식들에게 내어주느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어머니는 “느그 어매 젖은 진작에 보타져불고 수중에 일전 한닢이 없다”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목청을 돋워 노래를 부른다. 그런 어머니의 딸인 ‘나’는 중학생 아들의 요구로 이혼한 남편을 향해 양육비 청구 소송을 시작해 내키지 않는 재판을 이어가는 중이다.

옛 가족이 허물어진 뒤에 오는 외로움과 불안을 서늘하게 그려낸 '염소 가족' 또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나의 염소 가족들은 언제쯤 한마리도 빠짐없이 모일 수 있을까”라는 말로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어린 시절 사라진 염소처럼 뿔뿔이 흩어져버린 가족들의 저녁식사를 아스라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한편 소설은 쓰지 못한 채 강연으로 먹고사는 ‘행사작가’로 전락한 소설가 K의 이야기와, ‘쌍용자동차 사태’를 바깥에서 지켜보는 여성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사는 일의 서러움을 그려낸 '설운 사나이'도 잊지 못할 감동을 준다.

다섯살 아이의 납치 계획을 세우는 퇴임교수 ‘윤’의 고요한 일상을 그린 '오후 다섯시의 흰 달'은 아내와 아들이 사고로 죽고 하나 남은 딸마저 독립을 해 집을 나가면서 혼자 남게 된 ‘윤’이 우연히 알게 된 다섯살 아이를 통해 묘한 생기를 찾게 되는 과정이 스산하게 그려진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인 오후 다섯시는 그 끝에 고요한 밤이 올지 불안한 밤이 올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경계에 있는 애매한 시간이다. 어쩌면 작가는 그 시간 뒤에 ‘흰 달’을 둠으로써 희미하게나마 비치는 빛의 자리를 남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된 슬픔은 더는 슬픔의 자리에만 머물지 않는다. 은주의 카메라 앞에서 말 못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다 풀어놓은 이모는 밤새 내린 비로 말개진 봄날 아침, 날아가는 노랑나비를 쫓는다. 이제는 다음 세대인 은주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다. 긴 침묵의 끝에서부터 시작될 그 이야기는 비로소 ‘은주의 영화’가 되어 흰 달빛처럼 독자들 곁을 오래도록 비출 것이다. 

언제나 우리 곁 가장 아픈 자리를 써온 작가 공선옥, 우리를 대신해 울어주고 노래해주는 그의 소설이 있는 한 곧 다가올 밤이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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