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그림처럼 모든 게 일그러지는 저녁
고흐의 그림처럼 모든 게 일그러지는 저녁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9.08.22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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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서른한 번째 이야기 / 강진수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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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나탈레스를 떠난 건 이른 새벽, 토레스 델 파이네를 가기 위해 들렀었던 버스 터미널에서 엘칼라파테로 가는 버스를 찾을 수 있다. 잠이 덜 깬 눈을 부비며 가방을 짐칸에 싣고 좌석에 앉자마자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파타고니아는 넓고도 넓어 버스로 한참을 달려야 겨우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의식도 없이 침을 흘리며 꿈을 꾸고 있을 때, 승무원이 우리의 어깨를 건드리며 일어나라고 말했다. 드디어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우리의 마지막 여정이 기다리는 마지막 나라. 짐 검색을 받고 여권에 도장을 받고 나니 아르헨티나에 오고야 말았다는 것이 조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 길고도 짧은 남미에서의 여행 동안 마지막으로 찍힌 푸른 색 도장이 선명하게 여권 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입국 수속은 금방 끝이 났고 다시 버스에 앉아 언제 깨어있었냐는 듯 의식을 다시 잃었다. 오랜 시간 버스를 타는 것도 이제 익숙해져버렸는지 불편한 자세로도 잠드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달리다보니 버스가 드디어 완전히 멈춰 섰다. 엘칼라파테의 조그만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것이다. 내려서 시계를 보니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지난 때였다. 정신없이 자느라 몰랐던 배고픔이 급격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단 짐을 들고 호스텔을 찾아 방으로 모두 짐을 옮겨 놓았다. 호스텔 안에는 부엌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나중에 저녁은 음식을 해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은 가방에 남아 가지고 있던 빵과 하몽으로 간단히 샌드위치를 해먹었다. 그리고 부엌에 놓여있는 따뜻한 커피를 한잔 하며 잠시 쉬다가 호스텔 로비에서 태즈를 만났다. 영국에서 온 태즈, 그녀는 로펌 비서를 하다가 관두고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마침 자신도 엘칼라파테의 모레노 빙하를 투어하려 하니 같이 알아보자고 했다.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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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칼라파테는 앞서 다녀온 푼타아레나스나 푸에르토나탈레스에 비해서도 더 자그마한 마을이다. 걸어서 다녀도 금방 마을 중심부를 전부 돌 수 있다. 대부분 호스텔에서 나와 여행사를 찾다 보면 여러 회사들을 발견할 수 있어 가격을 비교하고 신중히 선택해서 다시 흥정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서는 단 하나의 여행사에서만 빙하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호스텔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 여행사에서만 이곳 모레노 빙하의 모든 투어 상품을 독점하고 있다고 했다. 오직 그 회사의 버스를 타고서 빙하를 들어갈 수 있고, 그 회사의 유람선을 타야지만 모레노 빙하로 접근할 수 있다. 게다가 독점 상태이니 가격은 비상식적으로 비쌌다. 빅 아이스 투어, 스몰 투어, 그리고 전망대 투어, 총 세 가지가 있는데 그 가격들이 천차만별인데다가 가장 기본인 전망대 투어만 하더라도 10만원이 넘어가는 금액이었다.

빅과 스몰 투어는 모두 유람선을 타고 모레노 빙하에 접근해서 그 빙하 위를 아이젠을 신고 트레킹을 하는 상품이었다. 차이는 트레킹을 하는 코스와 소요 시간이다. 문제는 트레킹을 포함한다는 이유만으로 스몰 투어는 인당 40만원 가까이 하는 금액, 빅 투어는 70만원 정도의 금액을 요구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빙하로 알려진 모레노 빙하를 전망대에서만 겨우 보고 돌아와야 하는 건 너무 아쉬웠다. 그렇다고 예산이 트레킹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행사에서 더 알아보려고 직접 방문했지만 호스텔에서 얻은 정보와 동일했다. 고민과 고민을 거듭했지만 좋은 방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독점으로 여행객들을 압박하는 회사에 맞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독점을 허락하는 이 나라 역시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우린 결국 태즈와 울며 겨자 먹기로 스몰 투어를 신청하고 값을 치렀다. 그래도 빙하를 한 번 밟아보고 이곳을 떠나야 후회가 안 남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우린 태즈와 함께 허탈한 마음으로 여행사를 나서고, 저녁거리를 사놓기 위해 마을의 유일한 마트로 갔다. 아르헨티나에는 어느 곳보다 저렴한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소고기와 와인이다. 물론 칠레나 다른 남미 지역에서도 소고기와 와인은 매우 저렴한 편이지만, 아르헨티나는 팜파스라는 거대한 목초지를 가지고 있어 어마어마한 양과 질 좋은 소고기가 값싸게 유통된다. 또한 넓은 땅에 많은 와인 농장들이 마찬가지로 값싼 와인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마트에서 우리가 사야할 것은 와인과 스테이크용 소고기, 그리고 곁들여 먹을 채소 정도였다. 꽤나 두툼한 소고기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마을의 유일한 투어 상품은 독점으로 비상식적인 금액을 요구하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비싸서 잘 먹지 않는 소고기가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흔한 것에 불과하다니. 부조리를 뒤로 하고 일단의 스테이크와 와인, 그리고 내일의 빙하 트레킹을 즐기기로 했다. 이미 써버린 돈 어쩌겠냐는 마음으로,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던가.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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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본 것을 호스텔로 들고 가려는데, 현금이 모두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태즈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근처 은행을 들렸다. 금방 현금을 찾고 다시 나와 길을 걷는데 형이 급히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여행 자금을 모두 넣어 둔 카드를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어디에 떨어뜨렸나 싶었지만, 떨어뜨렸으면 앞뒤로 걸어가는 나와 태즈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급하게 은행을 다시 찾아갔지만 그곳에서도 카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진정하며 돌이켜 생각해보니, 형이 기계에서 현금을 찾은 후 카드를 되찾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카드를 일정 시간 안에 찾아가지 않으면 보안을 이유로 기계에서 카드를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미 은행 문은 닫아 있었고, 기계 옆에 붙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곳의 대답은 내일이 당장 주말이라 은행이 열지 않아 카드를 찾으려면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형의 표정은 절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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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는 평온했다. 형과 내가 싸우고 다퉜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이런 일은 별로 두렵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누가 카드를 훔쳐갔다면 모를까, 기계가 삼켰다면 당장 우리의 자금은 안전한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며 한국의 카드사와 통화하려 고군분투하는 형을 옆에서 다독이고 나서 태즈와 둘이 부엌에 들어가 재료를 다듬고 고기를 구웠다. 고기가 맛있게 익어갈 때 즘, 형이 창백해진 얼굴로 내 곁에 와 말했다. 잃어버린 카드 정지했고, 갖고 있는 다른 카드로 그 계좌에서 계속 출금할 수 있대. 나는 다행이라고, 수고했다고 말하고 마저 고기를 구웠다. 채소를 곁들이고 와인을 따랐다. 태즈가 우리 곁에 앉았다. 잔을 부딪치며 내일 있을 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했다. 나는 잠시 로비에 앉아 책을 읽었다. 태즈가 내 책에 대해 물었고 우리는 책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밖에선 바람이 거세지 않게,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게 불어오고 있었다. 호스텔 바로 앞 사이프러스 나무가 소리를 내며 가지를 흔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서나 보던 그 나무가. 먼 대륙의 파타고니아 한복판 작은 마을에 있었고, 바람은 불었다. 고흐의 그림처럼 모든 게 일그러지는 저녁이었다. 시간도 공간도, 형과 태즈도, 호스텔의 불빛도.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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