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다정했던 한때
다정했던 한때의 산비둘기 부부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새들이 가끔 유리창에 부딪히거나, 혹은 부딪힐 뻔하다가 황급히 유턴하는 꼴을 보기는 했지만, 그렇게도 맹렬하게 가속도를 내서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받고 그대로 나가떨어진 꼴을 보기는 처음이다. 얼마나 가열차게, 얼마나 전속력으로 달려왔던 것인지 산비둘기는 부러진 목에서 뼛조각이 가죽을 뚫고 나와 피가 흘렀고, 그야말로 즉사하고 말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죽기 전에 날개라도 한두 번 파닥거리고, 발이든 목이든 근육을 몇 번 미세하게나마 꿈틀거리기 마련이건만, 이 녀석은 총알처럼 날아와서 부딪히고, 떨어지고, 그대로 완전히 동작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으니,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연상케 하는 그 장면을 고스란히 목도한 나로서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마음에 그만 정신이 다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산비둘기 저희들이야 뭐 인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겠지만, 나는 그들을 4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보고 있었고,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정이라는 것이 들어서 흔한 말로 가족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사실은 그것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긴 했다.

커다란 꿩이 마당에 와서 놀다가 사람 기척에 혼비백산 흡사 포탄이라도 터뜨리는 것 같은 자발스런 소리를 내며 달아나는 꼴은 더러 보았고, 해가 질 무렵이면 뻐꾸기 부부가 웅덩이에 와서 교대로 목욕을 하는 장면 또한 익히 보아 왔지만, 산비둘기가 사람 집 마당에서 연애행각에 몰두하는 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광활한 들판에서야 물론 산비둘기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이것이건 저것이건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서 유해조수로까지 지정이 되어 있다지만, 사람이 무시로 움직이는 집안에 들어와서 떠날 줄을 모르고 날마다 구구, 소리를 낸다는 것은 분명 낯선 풍경이었다.

도시의 비둘기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는 까닭에 사람을 동지 내지는 친구라고 여기겠지만, 산비둘기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경계한다. 그런데 어쩐 일로 금년에는 산비둘기 한 쌍이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와서 감나무와 대추나무와 오동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은행나무 등으로 옮겨 다니며 자기들의 다정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직은 먹을 것도 별로 없는 4월의 어느 하루 산비둘기 부부는 내 의식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게 산비둘기라는 것조차도 몰랐다. 마당에 나와 있노라면 가끔 들리는 구구,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의식에 담아 두지는 못했다. 4월의 시골이란 온갖 생명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는 까닭에 구구, 하는 정도의 낮은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고, 들린다 해도 이게 무슨 소리지? 하다가 다른 관심사에 밀려 이내 잊어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게 한두 번이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날며칠 간헐적으로 반복되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뭐냐, 하는 심사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들 산비둘기 부부를 발견했더랬다.

 

산비둘기의 죽음
산비둘기의 죽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왜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백여 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심었다고 하는 아스라이 높은 감나무 중간 부분 가지에 그들은 마주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생각 없이 보면 감나무 가지 중에 일부로 착각하기 딱 좋았다. 봄날의 감나무는 잎이 아직 활착하기 전이라서 대체로 회색 계통이고, 산비둘기의 색깔 또한 회색과 갈색이 배합된 까닭에 목적의식이 없이 보면 감나무와 산비둘기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나뭇가지와 산비둘기를 구별하는 눈이 생긴 나는 그날 이후 마당에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그들을 찾게 되었다. 무엇보다 구구, 구구, 하고 가끔 들려오는 산비둘기의 소리가 마치 생각을 해봐, 생각을 해봐,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사랑이 필요해, 사랑이 필요해, 하는 것 같기도 해서 듣기에 제법 좋았다.

듣기에 좋다 보니 그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자꾸 찾아보게 되고, 구구, 구구, 하는 그 소리가 언제쯤이나 또 들릴까, 귀를 쫑긋이 하고 기다리기를 취미처럼 하게 되었으니, 어떤 날은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서성거리거나 혹은 우두커니 앉아서 구구,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시간을 잊은 채로 한없이 기다리고 있노라면 커피는 다 식어서 맹탕이 되고, 커피 맛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뒤에서야 나는 비로소 정신이 깜빡 돌아와서 아따 이게 뭔 짓이냐, 하고 실없는 웃음이나 실실 흘리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시간이 너무 좋아서 포기가 안 되던 것이었다.

산비둘기 커플은 물론 나뭇가지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배가 고프면 마당으로 내려와서 이것저것 나란히 종종걸음을 걷기도 하고, 대나무들 사이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부리와 발로 헤집어서 무엇인가를 쪼아 먹기도 했다. 대나무 숲속에 산비둘기가 먹을 만한 게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르고, 모르는 까닭에 무엇을 저리도 맛있게 먹을까 궁금해서 보고 또 보고 자꾸 보는 동안 나는 차츰 산비둘기의 우중충한 색깔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산비둘기는 어쩐지 그런 색을 지녀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뻐꾸기가 떠올랐다. 산비둘기와 뻐꾸기는 색깔과 이미지가 거의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러나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산비둘기는 생김새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제법 잘 조화스럽다는 느낌인 반면 뻐꾸기는 아니다. 날아가면서도 뻐꾹, 소리를 내고, 앉아서도 뻐뻐꾹, 소리를 내는 뻐꾸기의 경쾌한 소리로 미루어볼 때 그 모양도 꽤나 화려하게 생겼으려니 짐작했지만, 우리 집 마당에 파놓은 연못에 와서 목욕을 하는 뻐꾸기 부부의 모습을 실제로 본 나는 참 많이도 실망을 했었더랬다.

뻐꾸기는 암컷인지 수컷인지 알 수 없는 한 마리가 뻐꾹, 하면 역시 암컷인지 수컷인지 알 수 없는 다른 한 마리가 다른 쪽에서 뻐뻐꾹 뻐꾹, 하는데 같으면서도 다른 그 두 가지 소리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주고받는 소리, 즉 부르고 답하는 소리였다. 이를테면 너 어디 있니, 나 여기 있어, 하는 뭐 그런 것 말이다. 소리는 그렇게도 경쾌하고 화려하고 뭔가 빛나는 것이 막 쏟아질 것만 같은데 생김새는 왜 그렇게도 우중충하고 우울하게 무슨 염세론 같은 것에라도 빠져 있는 젊은 철학도를 연상케 하는지, 뻐꾸기가 내 눈앞에 없을 때도 뻐꾸기를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지곤 했다.

 

창문으로 산비둘기가
창문으로 산비둘기가~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상사화
상사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뻐꾸기에 비하면 산비둘기의 소리는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품고 있다는 느낌이다. 낮은 소리로 가만히 이따금 구구, 하는 그 소리는 여러 말 필요 없이 그냥 정겹다. 까치나 어치처럼 날카롭게 자발스럽지 않고,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이지도 않고, 애처롭지도 않으며, 서글픈 회한 같은 것을 끄집어내지도 않고 그저 다만 구구, 구구, 하는 산비둘기의 그 담박하게 애상한 소리는 겉치레를 죄다 걷어내 버린 진정성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그 소리는 가끔 생각해 봐, 생각을 해봐, 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에게 사랑이 왜 필요한지 알겠어? 하는 질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는 문득 사랑이란 뭐지? 하는 의문에 잠겨보기도 하고, 생각 없는 삶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개똥철학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대단한 깨달음에라도 이른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내내 풀리지 않는 의문 한 가지가 있으니,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을 하고 짝짓기도 했건만 어째서 그 결과는 안 보이는가 하는 점이었다. 암수 한 쌍이 사랑 놀음을 했으니 어딘가에 둥지를 틀었을 것이고, 알도 낳았을 것이고, 알을 낳았다면 새끼가 나왔어도 두 번은 나왔음직 하건만 도무지 새끼를 볼 수가 없으니 이게 대체 뭔 일인가 말이다.

쟤들은 애초부터 불임이었는가? 아니면 내가 청맹과니라서 저기 어디에 있는데도 못 보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혹시 저 녀석들이 사람인 내가 볼 수 없는 그 어떤 신묘한 방식으로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몰래 육아를 하는 것일까?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슬쩍 알을 낳고 달아나는 방식으로 번식을 한다는 거야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산비둘기도 그렇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 없는 나로서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온갖 생각의 거미줄을 엮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새나 멧새, 동박새, 미영새 같은 작은 새는 물론이고, 커다란 새 꿩의 알과 그 새끼들은 숱하게 보았고, 까치도 높은 나무에 집을 짓고 열심히 드나드는 방식으로 자신의 육아활동을 공개하고 있건만, 도대체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와서 떠나 줄을 모르는 산비둘기 부부는 둥지도, 알도, 새끼도 보여주지 않고 사랑 놀음에만 빠져 있으니 어쩔 것인가.

하나의 물음표가 둘을 낳고 둘은 넷, 여섯으로 계속 증식하면서 나는 바야흐로 물음표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자다가도 문득 쟤들은 왜 새끼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책장을 넘기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도 불현듯 그 생각이 나서 밖으로 나와 산비둘기 부부의 행적을 추적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되었다.

산비둘기 부부의 행적을 추적한다고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명백하게도 한정돼 있었다. 나 자신이 새가 아닌 이상 그들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 볼 수는 없고, 내 눈에 보일 때만 그들을 집요하게 주시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면 닭 쫓던 개의 신세가 돼서 허탈해 한다. 허탈한 심사로 그들이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니, 나는 왜 새가 되지 못하고 사람 따위가 됐을까 하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투정조차도 어떤 때는 막 일어나서 살맛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자스민
자스민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흐린 날의 자스민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렇게 시간이 흘러 봄날은 훌쩍 가 버리고, 여름도 무르익어서 땡볕이 무섭게 쏟아지는 계절이 되었건만 산비둘기 부부와 나의 거리는 한 뼘도 좁혀지지 않은 채 처음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가 너무 어려우면 슬슬 덮어버릴 궁리를 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했던가. 이글이글한 땡볕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마 살 길을 찾듯이 산비둘기 부부에 관한 흥미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때마침 상사화가 꽃대를 쑥쑥 밀어 올리고 있었고, 방안에 둔 쟈스민 또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쟈스민은 꽃이 워낙 작고 향기도 멀리까지는 밀어내지 못하는 까닭에 가까이서 봐야 맛이 있지만, 상사화는 가까이에서보다 멀리서, 그것도 가능하다면 유리창 같은 것을 사이에 두고 조금은 어렴풋하게, 아련하게 보고 있을 때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든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마당 여기저기에 심고 창문 앞에서 심었으니 모를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골랐는지 알 수 없지만 ‘자크린느의 눈물’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은 채로, 아슴하게 콧속을 간질이는 자스민 향에 취하고, 정말로 무슨 상사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비실비실 애상하게 금방 주저앉아서 훌쩍일 것만 같은 상사화의 이미지에 흠뻑 취해 있던 그날 오후 두 시 무렵에 그 일은 벌어졌다.

마치 누가 어디 멀리서 커다란 돌멩이라도 느닷없이 있는 힘껏 던진 것 같았다. 색깔도 돌멩이를 연상케 하고, 날아오는 속도도 집어던진 돌멩이와 같았다. 그것이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앞 유리창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었고, 그것을 발견한 내 입에서 어 저게 뭐야, 하고 놀라워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는 순간 유리창에 턱 부딪쳤다. 그리고 떨어졌다.

놀라워라. 이게 대체 뭔 일이냐. 유리창을 열어보고 말 것도 없이, 그것은 산비둘기였다. 녀석은 바닥에 떨어진 채 꼼짝도 안 하는 것이 벌써 죽어버린 것 같았다. 목덜미 털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마 목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가 좌우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한 마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다음 날에라도 혹시 나타나서 죽은 자를 위해 곡이라도 할까, 기다려 보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른 한 마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왜? 왜 이렇게도 참혹하게 죽은 거야? 부부싸움 같은 것이라도 매우 심하게 했는가? 그래서 한 마리는 벌써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남은 한 마리는 자결을 결심했는가? 아니면 그냥 우연한 사고?

아 이것은 미스터리다. 진정한 미스터리다. 이 미스터리는 아마 꽤 오랜 기간 내 의식을 차지하고 앉아서 아무 때 아무 데서나 불쑥 튀어나오곤 할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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