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 문학과지성사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는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 번 소리질렀다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法)도 없어 법(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 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이성복, <어떤 싸움의 기록>,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싸움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기억이란 상처의 틈과 같아서, 기억을 안고 살아가면 자꾸 그 틈이 벌어진다. 싸움은 쉽게 아물지 않고 질기게 살아남아 진물과도 같은 피를 조금씩 뱉어낸다. 우리는 그런 싸움을 언제 할까. 소중한 사람이 하는 싸움, 소중한 사람을 위한 싸움, 나를 위한 싸움, 그리고 내가 하는 싸움. 내가 그렇게 연관되어버리는 싸움들은 나를 그 상처의 틈 사이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런 싸움은 정당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밀려드는 죄책감과 세상에 대한 신물은 왜일까. 우리는 지긋지긋한 도덕과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한다.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변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객기와 ‘어머니’와 ‘누나’들의 비명, 지독한 막말들과 ‘개’처럼 울부짖는 ‘나’가 ‘땀 냄새’, ‘술 냄새’로 적셔진 시 속에 있다. 그런 세상 속에 있다. 시는 무엇과 싸우고, 가족은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누구를 죽이고, 무엇을 저주하며 사는 걸까.

 

ⓒ위클리서울/출처=pixabay.com
ⓒ위클리서울/출처=pixabay.com

이성복 시인의 싸움은 기록으로 남는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기억은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포함하는, 때로는 아주 무질서하게 남으며, 또 가끔씩 아주 개인적인 조각조각들이 모이거나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기록은 의도적으로 남겨놓는 기억이다. 누군가에게 전하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다시 과거를 살피거나,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록이란 그것을 남기는 자의 생각과 마음이 담기는 것이 사실이다. 시로 돌아와, 싸움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은, 시인이 그 시 속에서 홀로 ‘기록을 남기는 자’가 되는 작업이다. 시인은 방관을 하고, 바라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 기록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왜 시를 기록의 방법으로 사용했는지, 그리고 시인에게 시 속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인지일 것이다. 그렇게 기록을 읽는 우리의 습관은 시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곤 한다. 그러나 그 습관은 기록 속에서 싸움을 삭제한다. 싸움이란 너무나도 이유 없이 일상적인 소재를 우리는 습관적으로 금기시하며 배제한다. 싸움이 발생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불가피하고, 정당한 싸움이었을 것이라고 으레 가정하는 것이다. 결국 싸움이 기록이 되어버린 순간, 그 기록을 읽는 우리는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도덕과 옳고 그름 따위의 것들을 꺼내든다. 우리는 도덕을 아는 사람들. 도덕을 배워온 인간들이다.

그런 습관성 도덕을 제쳐주게끔 만드는 단어는 ‘어떤’ 이라는 불특정한 수식어일 것이다. ‘어떤 싸움’이라는 말은 ‘싸움’이 특별하고 비일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 일상의 영역 안에서 싸움이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직접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시 속에서 ‘아버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에 맞서는 혹은 그가 맞서는 또 다른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싸움 속의 ‘그’ 역시 일상 속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따위의 습관성 도덕, 습관성 기록 읽기를 관두고 나면, ‘그’가 ‘아버지’ 주변의 누구든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일 수도, 지나가다 부딪친 사람일 수도,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일 수도, 순찰을 돌던 순경일 수도, 친척이나 가족일 수도, 이웃집 식구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개처럼 울부짖는 나’와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와 누나들’ 뿐이다. 그들이 멀찍이 싸움의 원 바깥에 있는 이유는, 그 바깥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끔찍한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결코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 싸움은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폭언과 폭력을 주고받는 ‘아버지’와 ‘그’ 역시도. 싸움은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바깥을 부수고, 도덕과 기록의 형식을 아무렇지 않게 파괴한다. 특별한 것들은 변함없는 것들에 의해 쉽게 부서진다.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일상적이지 않은 삶은 문 바깥에 있다. 문 바깥으로는, 싸움의 소용돌이로부터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 사람들의 얼굴이 싸움의 현실과 격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은 반짝이는 꽃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동경할만한 혹은 이상적이고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다. 보고 싶은 ‘별’이 보이지 않고 대신 ‘라일락꽃’만이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결코 꽃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고, ‘나’는 다만 꽃들로부터 이질감을 느낀다. 문 안과 바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생의 이질. 죄를 짓기 싫어 또는 두려워, 법도 없냐며 그토록 법을 부르짖는 ‘나’와 ‘개’의 동질. 무엇 또는 누가 되돌아오기에 ‘아버지’는 문을 열어두라 했을까. 이성복 시인은 수수께끼 같은 생을 느끼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낸다. 문 바깥의 별을 기다리는 것일까, 반복되는 싸움을 기다리는 것일까. 바람이 비린내를 몰고 오는 것을 보면, 문의 바깥쪽 역시 비리고 쓰라릴 뿐인가 보다.

사람의 높고 낮음을 따지며, 피를 주고받는 싸움을 천박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얼굴에 핀 라일락꽃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며, 비린내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시인의 입을 빌려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누군가 이 시가 기록하는 것의 끝을 궁금해 하거든 나는 답해주곤 했다. 아직 잠들어 있을 뿐이다. 아직 잠들어 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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