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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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어 중학교의 난타 동아리 수업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2학기 첫 수업을 가기 전 나는 아이들 이름과 사진 속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수업내용과 앞으로의 진도를 점검했다. 학교 축제일까지 단 4회만을 남겨 둔 시점. 긴장도 되고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두려움과 약간의 설레는 마음도 생겼다. 마냥 두렵기만 하던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던 탓일까. 늦여름 열기가 기승을 부리던 2학기 첫 수업 날. 난데없는 복병을 만났다. 아이들은 덥고 힘들다며 휴강하자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다른 동아리들은 영화를 보러 갔다는 둥, 어떤 동아리는 치킨을 시켜 먹는다는 둥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전혀 예상 밖의 주장을 단체로 들이대는 것이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헛웃음만 나왔다. 주로 운동장에서 활동하는 배드민턴 동아리가 더운 날씨 탓에 교실에서 치킨파티를 하고 있으며, 영화평론 동아리가 실습 겸 외부로 영화 관람을 하러 나갔다고 코티칭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따지고 보면 난타 동아리는 시원한 강당에서 수업을 하니 날씨의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난타 공연이라도 보러 가야 했나 싶은 생각에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치킨을 시켜 먹든 외부로 현장학습을 나가든 학교 측에 먼저 허락을 받고 움직여야 하는 절차상 당장의 휴강은 불가능했다. 다음 수업시간에 간식 타임을 약속하고 대신 축제 대비를 위한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니 정말 순식간에 화두를 축제로 바꾸어 각자의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나이 드는 시간만 순식간인줄 알았는데 청소년들의 생활 속도 또한 순식간이어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힘들다. 의상을 체육복으로 한다는 아이, 교복을 입자는 아이, 청바지에 검은 티를 입자고 하니 검은 티가 없다는 아이 정말 각양각색이다. 심지어 공연을 안 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는 친구도 있다. 학기 초, 동아리 지망을 할 때 인기 있는 동아리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4지망 혹은 5지망으로 난타를 선택한 아이들이라 더욱 공연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 아이들 꽤나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데 특이하게 가면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 저희요....가면 쓰고 공연하면 안돼요?”

청소년들은 스스로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타인들도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상의 청중을 만들어 내고 그 청중들이 모두 자신에게 주의 집중하고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작은 실수에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당황하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상상의 청중을 의식해서 행동하므로 많은 에너지를 쓰고 사소한 언행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한다. 아마 이 아이들은 전교생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첫 무대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나 큰 것 같다. 이건 상상의 청중이 아니라 실제로 몇 백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가면 쓴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가면 디자인도 한 번 생각해 볼까?”

2학기 첫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과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지 무척 흥미로웠다. 아이들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나는 따를 생각이다. 아이들 나름대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해 놓은 틀 안에 아이들을 껴 맞추려 했던 지난날의 수업시간들이 생각났다. 나 또한 아이들을 통해, 수없는 과오와 경험들을 통해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나. 이 아이들을 만날 기회는 이제 세 번 밖에 남지 않았으니….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가을장마를 알리는 비가 제법 내리던 날 두 번째 수업시간. 지난 번 아이들과 약속한 바도 있고 해서 치킨을 시켰다. 아이나 어른이나 일단 먹는 걸로 시작해야 일이 잘 풀리는 건 만고의 진리다. 진작 먹여놓고 볼 것을…. 화두는 역시나 축제 이야기로 시작했다. 코티칭 선생님이 동네 사람들 다 초대할 예정이니 공연 제대로 하라는 으름장(?)을 놓고 가신 덕택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연습을 해야 한다며 북을 미리 준비하는 아이뿐 아니라 지난 시간에 배운 가락이 생각이 안 난다며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와 물어 보는 아이도 있다. 어휴… 이렇게 고마울 때가 다 있나 그래. 결혼 전 남자친구가 옆으로 다가올 때 보다 더 긴장되고 기쁘다. 게다가 오늘 선생님 패션이 미소녀 같다고 칭찬해주는 아이는 볼에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성추행으로 신고당하기 전에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다.

작품 마무리를 하는데 그 여느 때보다 집중하는 걸 보니 아이들 스스로 축제에 대비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학기 초부터 정말 하기 싫은 게 눈에 띌 정도로 시큰둥한 아이가 있었는데 심지어 이 아이마저도 진지한 자세를 보여 준다. 지난 시간에 나왔던 가면 이야기는 쓰지 않기로 했단다. 이유는 굳이 물어 보지 않았다. 무슨 생각들이 있었겠지. 의상은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기로 했단다. 다음 시간이 되면 또 바뀌어 있으려나.

‘불타’라는 팀 이름을 애초에 정해 놓은 터라 BTS(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라는 곡으로 작품을 진행했다. 청소년들이라 그런지 받아들이는 속도가 스펀지 물 흡수하듯 쫙쫙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안 하면 안 돼요?’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던 아이들. 어느새 축제의 첫 문을 열어주는 역할의 중요함을 깨달아 열심히 임하고 가끔씩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본다. 어느새 정이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어쩌나. 수업시간은 딱 두 번. 그리고 축제를 마지막으로 이 아이들과는 헤어져야 한다. 성격이 살갑거나 다정다감하지 못하여 애정 표현을 잘 못하는 편이어서 그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이 아이들이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고, 철이 들고, 세월이 조금 지나도 중학교 1학년 때의 난타 동아리 반을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내 욕심이겠지. 그렇지만 앞으로 이들이 겪어내야 할 험난한 입시 경쟁 속에서 즐거웠던 추억 하나로 마음속에 조그맣게 자리 잡아 준다면.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 가끔 떠올라 미소 지을 수 있는 기억으로 남아준다면 참 좋겠다. 나 또한 이 아이들을 통해 한 뼘 성장한 느낌이다. 마냥 다가가는 것은 금물이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어떻게 아이들의 생각을 읽어내고 이해해야 하는지는 대학에서 공부했던 것과는 별개로 실전에서의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정들자마자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겠다.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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