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전주국제영화제 탐방기-3편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국제영화제 탐방기의 마지막 편이다. 1편은 졸업을 앞둔 와중에 영화 동아리와 영화제를 선택하게 된 이야기를 풀어보았고, 2편은 영화제가 생소한 사람들을 위해 그 생생한 풍경을 그려보았다. 마지막 편인 3편은 올해 스무 번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의 주제부터 찬찬히 살펴보려한다. 전주에서 관람한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고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다.

지난 5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 테마는 ‘뉴트로 전주’였다. ‘뉴(new)’와 ‘레트로(retro)’를 합성한 ‘뉴트로’는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뜻한다. ‘뉴트로 전주’는 비전을 함께 공유해온 동시대 작가들과 전주의 미래를 엿보자는 두 시제의 뜻이 담겼다. 다채로운 변화와 대안적인 목소리를 높여온 작가들과 더욱 긴밀히 협력하겠다는 의지다. 작가 선별 기준에는 “2018년 이후 한 편 이상의 신작을 발표”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과거의 영광에만 머무르지 않고 내일을 지향하며 전진하는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실험적이고 색다른 영화제로 평가받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뉴트로 전주’ 섹션의 작품 중 내가 본 것은 제임스 베닝의 <국가의 탄생>, 헬레나 위트만의 <21,3℃>와 <난폭한 파동>이다. 하루에 여려 편의 영화를 감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마련이라 영화제임에도 불구하고 2박 3일의 여정 동안 많은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위의 영화들은 팔복예술공장에서 전시 형태로 열려 부담 없이 하루에 모두 감상할 수 있었다. (팔복예술공장은 공장의 특징을 살려 개조한 예술 공간으로, 영화제 기간에는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가 무료로 개최된다. 이전 편 참조.)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린 ‘익스팬디드 플러스:유토피안 판톰’은 앞의 세 영화가 소개된 전시다. 영화를 극장이 아닌 곳에서 설치 형식으로 선보이며 영화와 시각 예술, 극장과 갤러 N 리 등의 경계를 허무는 전주만의 창의적인 큐레이션이다.

시간과 지각 경험을 의제로 삼아온 제임스 베닝의 <국가의 탄생>은 한 영화에서 선형적으로 등장했던 세 장면을 동시에 병렬한 작품이다. 서사에 따라 나열된 미국 남북전쟁 중의 쓰러진 병사들, 목화를 따는 흑인들,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는 KKK단의 행렬의 세 장면을 시간과 공간을 고려하지 않고 한 곳에 배치한 것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장면들이 동시에 상영되는 것을 보며 폭력을 둘러싼 원인과 결과의 선형성이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폭력의 원인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서 찾아야 하지만, 가해의 이유를 찾는 것이야말로 지난하고 공허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가해자에게 마이크를 쥐어줬을 때의 찝찝한 감정, 폭력이 포르노처럼 전시되는 것에서 오는 일종의 죄책감이 폭력에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 복합적인 감상을 유도해낸 영화의 고민과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작은 방안에 가만히 있는 가구와 움직이는 물건의 대비를 담아낸 <21,3℃>와 같은 성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다양한 모습의 파도를 담아낸 <난폭한 파동> 역시 영화의 원리를 잘 담아냈다. 본래의 의미를 재설정하고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헬레나 위트만 감독 특유의 관점과 감각이 돋보였다.

 

전주 전경
전주 전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 전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 전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그 외 질문과 논쟁, 혹은 논란까지도 불러올만한 문제작들을 선별하는 ‘프론트라인’, 한국 다큐멘터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코리아시네마스케이프’ 등 많은 주제가 다양성 영화를 지지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신기술 VR을 사용한 ‘VR 시네마 특별전’도 있었는데, 함께 영화제를 즐긴 동아리 친구들에 의하면 우주 속에서 행성을 만지고 튕겨보는 등의 체험이 가능했다고 한다. 전주는 한옥마을과 도시가 조화를 이루는 지역인 만큼 기억해야 하는 과거의 가치와 주목해야 할 미래의 가치 모두를 조명하는 듯 했다.

2박 3일의 여정 동안, 앞의 단편영화들 외에 세 편의 영화를 더 감상했다. 이전 편에서 다룬 <스타워즈>와 <뉴욕 42번가 기타샵>,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마지막 영화>다. <뉴욕 42번가 기타샵>은 뉴욕의 오래된 고목을 수집해 친환경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기타를 만드는 장인의 다큐멘터리다. 오랜 시간 하나의 노동을 꿋꿋하게 지속해온 장인의 정신과 기타의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젖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기타를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소재가 있거나 서사가 있는 영화가 아니라서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다짐으로 영화를 관람했다. 그러나 기타샵의 손님은 루 리드, 밥 딜런, 패티 스미스 같은 유명 뮤지션이고, 영화감독 짐 자무시와 같은 손님들이 드나들며 음악과 기타에 관한 담소를 나누었다. 인기가 많은 뮤지션이 등장하거나 관련자들이 그를 거론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관객의 탄식도 이어졌다. 다큐멘터리 계의 블록버스터, 어벤져스 수준이었다. 극장을 나서며 함께 영화를 본 동아리 사람들과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타샵의 손님들이 자신의 기타가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철학과 취향을 나누는 대화를 감상하고 따라하며 영화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추억이 새겨졌다.

 

<뉴욕 42번가 기타샵>,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마지막 영화> 포스터 ⓒ위클리서울/전주국제영화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마지막 영화>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영화를 돌이켜보는 여성 감독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숨이 멎는 감동을 느꼈고, 실제로 영화가 끝이 난 순간에도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뜨거운 박수소리가 시작되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계의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누벨바그’ 운동과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감독이다. 1950년대 말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새로운 여성 서사가 담긴 작품들을 만들어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칸의 황금종려상을 여성 최초로 받은 감독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가 90살에 만든 영화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며 팬이 되었고, 처음으로 나의 노년을 상상할 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아내, 혹은 엄마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여성이 노후에도 일을 지속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노후를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며 식단에 건강식을 추가하고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수많은 여성과 예술인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감독의 유작을 감상하며 전주국제영화제 탐방을 마쳤다.

 

전주 전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 전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 전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전주 전경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그동안 영화제는 서울에서 열린 영화제를 하루 정도 방문하는 것이 다였다. 며칠씩 시간을 내어 영화만 관람하는 것은 어쩐지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열리는 영화제는 방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용기를 내어 영화 동아리에 들어간 덕분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주국제영화제를 다녀올 수 있었다. 거대한 돔에서 웃고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보내며 <스타워즈>를 관람한 경험이나, <뉴욕 42번가 기타샵>의 기타샵 조수가 깜짝 방문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전주와 영화를 깊게 느끼고 영화제의 묘미 또한 진하게 느낀 시간들이었다. 앞으로 전국에서 열리는 다양한 영화제를 섭렵해봐야지. 작년에는 상상도 못한 목표를 새롭게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 전주국제영화제에 감사를 보내며, 탐방기는 여기서 막을 내리려 한다. 다음은 정동진독립영화제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