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9.09.12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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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본격적인 건조단계의 고추
본격적인 건조단계의 고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이 있으며,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는 불가의 인연생기설이 실감 나게 와 닿는 시절이다. 국제정치가 날마다 요동을 친다는 말이 매우 익숙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이라도 해주듯이 날씨는 변화무쌍의 첨단을 달리며 예전의 기록을 쓱쓱 갈아치우고 있으니, 바야흐로 변화 내지는 혁명의 한복판 속에 내가 지금 들어와 있는 것일까?

올해는 추석 명절과 날씨의 조화가 예년과는 많이 달라졌다. 해마다 추석 즈음이면 여기저기에 허수아비가 서고, 새를 쫓는 공포탄 소리가 아련한 향수처럼 들려 왔건만 올해는 아니다. 작년만 해도 추석 전에 누렇게 알차게 익었던 벼이삭은 이제야 겨우 익어갈 채비를 차리고 있으니 추석 명절에 햅쌀밥은 일찌감치 틀렸다.

사과와 배는 대충 익기라도 했다지만 대추와 밤, 감들은 아직도 파랗게 무럭무럭 성장하는 중이고, 콩밭에 콩은 지금이 바로 적기라는 듯이 콩 꽃을 마구 피워내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거의 매일 비를 뿌리는 가을장마가 계속되고 있으니 아직도 여름인가, 가을은 언제나 오려나, 의구심에 눈을 깜빡거리며, 목을 길게 빼고 좌우를 살피는 풍경이 일상화되었다. 그나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은 빨간 고추가 말라가는 비닐하우스 안이다.

고창의 고추 농사에서 터널 농법을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이현국씨의 고추 밭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가 보았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이 번쩍 열린다. 마치 무슨 꽃이라도 붉게 무더기로 피어난 것 같다. 꽃은 꽃이로되 콧속으로 스미는 향기는 꽃의 그것이 아니다. 들어서는 순간 붉은 꽃이 눈을 환하게 밝히는가 싶더니 콧속이 간질간질하고, 이어서 재채기가 툭 튀어나온다. 꽃 앞에서 재채기를 한다면, 이것은 분명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꽃은 그런 꽃이 아니다. 재채기를 아니 한다면 오히려 섭섭해 할, 매콤함을 그 특장으로 하는 고추가 붉게 피어난 꽃으로 비쳐진 것일 뿐이니 미안해 할 일은 아니다.

고창의 고추는 해풍고추라 해서 그 이름이 제법 높다. 서해안의 바닷바람이 와서 고추를 말려주는 까닭에 때깔도 좋고 풍미도 좋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소금을 원하게끔 구성돼 있어서 바닷바람에 샤워를 한 고추가 때깔도 좋아 보이고 맛도 좋게 느껴지는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서울 등 대도시에서도 고창의 ‘해풍고추축제’가 열릴 때면 관광버스를 대절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고추를 구매해 간다. 축제현장이라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고추미녀 선발대회 같은 선정적인 행사는 없지만, 1등 2등 3등을 가리는 품평회는 있다. 등수 안에 들어간 고추는 당연히 그 주인이 상패와 상품을 받고, 현장에서 판매되는 가격 또한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우리는 인제 거기 안 나가.”

다 마른 고추를 선별하느라 분주한 이현국씨 부부에게 출품 여부를 물었더니 대뜸 그런 답이 나왔다. 과거에는 등수 안에 들어서 상도 받고 상품도 받는 등 화려한 축제를 만끽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출품 자체를 안 한다는 얘기였다. 상을 받는 화려한 기쁨과 영광은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당신들은 이제 묵묵히 고추 농사 자체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혀져서 내 가슴이 그만 먹먹해졌다.

 

부부가 마주않아 고르고 또 고른다.
부부가 마주않아 고르고 또 고른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말린 고추를 점검하는 이현국씨
말린 고추를 점검하는 이현국씨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러고 보면 고추농사 같은 힘든 일에 전념하고 있을 연배조차도 사실은 아니었다. 상투적인 일반 상식으로만 보자면 노후의 안정된 생활이라는 문장이 필요한 연치에 들어선 지도 벌써 오래 전이었다. 그렇다고 먹고살기 바빠서 고추 같은 힘든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었다. 공무원 생활로 정년을 했으니 연금만으로도 두 부부 살아가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자식들이 남부럽게 초라해서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국씨 부부의 고추 농사는 매년 조금씩 늘어나기만 했다. 그 바람에 무거운 고추 자루를 옮기다가 쓰러져서 보름도 넘게 병원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고추 농사를 눈 딱 감고 그만둬 버리지는 못한다. 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노라면 이현국씨 부부의 고추농사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어떤 사람은 잘살려고 산다고도 하지만, 잘사는 게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현국씨 부부의 고추농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이려니와, 잘사는 게 무엇이냐 하는 문제까지도 풀린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고추농사를 무슨 취미처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텃밭에 몇십 포기 심어놓고 밤낮으로 들여다보며 흐뭇해하는 정도라면 취미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삼만 여 포기도 넘는 고추를 이천 평도 넘는 경사도 심한 밭에 심어놓고 뼈골이 휘어지게 드나드는 노동을 취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현국씨 부부의 고추농사는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 맺어져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라 칭할 만하다고, 이렇게 말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보다 직설적이고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사서 하는 고생인 셈이다.

서울에 살던 이현국씨가 시골에 내려와서 공무원을 하며 고추농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애초의 목적은 돈을 벌자는 게 아니었다. 농촌에서 공무원을 하다 보니 농사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보다 선진적인 농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여기저기 다니다가 발견한 품목 중에 하나가 고추였다.

새로 발견한 농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 전에 내가 먼저 시범으로 해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 당연한 일이 이현국씨 부부의 노후생활이 안정과는 거리가 먼 고생문과 연결이 될 줄이야, 그때는 아마 꿈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고추따기 전용 회전의자
고추따기 전용 회전의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밭에서 방금 따 온 고추자루
밭에서 방금 따 온 고추자루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고추농사를 잘해서 좋은 고추를 생산했으니 어쩔 것인가. 중간상인에게 넘기기는 아깝고, 시골에서는 누구나 고추 농사를 지으니 이웃과 나눌 일도 없고, 서울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몇몇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고추를 받은 사람은 애써 지은 농산물을 공으로 받을 수 없다 해서 가격을 쳐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척이나 친구 혹은 직장 동료들에게 고창 고추가 겁나게 좋다는 등의 자랑을 했다.

입소문에 귀가 열린 몇몇 사람들이 나도 그 고추 좀 사고 싶다 했고, 이현국씨는 별 생각 없이 응했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별 생각 없이 몇몇 도시 사람들에게 고추를 팔았던 것인데, 이 사람들이 해마다 가을이면 주문을 해온다. 주문을 해올 뿐만 아니라 한두 명씩 새로운 손님을 데려온다. 그리고 그 새로운 손님은 자기 이웃이나 친구 혹은 친척 등 새로운 손님을 또 데려온다.

그 바람에 이현국씨 부부의 고추 농사는 해마다 조금씩 늘어만 갔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뿌듯하기도 했다. 나의 노고가 인정을 받았다는 데서 오는 기쁨만큼 큰 기쁨이 무엇이랴. 하지만 기쁨도 기쁨 나름인 법.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면서 아이고 이것 큰일났다, 싶은 순간이 왔다. 몸이 힘들어서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어쩔 것인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다지만, 이런 이상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은 뭐랄까,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싶기는 하다.

게다가 정까지 들어버렸다. 사람 사이의 정이라는 것, 이것 참 무섭다. 무섭지만 정겹다. 정겨워서 무섭고, 무서워서 정겨운 이런 양가적 감정은 내가 끊고 싶다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끊고 싶지도 않다. 다만 두려울 뿐이다. 몸은 자꾸 쇠약해져 가는데 고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꾸 늘어만 간다. 정분으로만 치자면 앞으로도 백 년 이상 고추농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몸은 안 된다고 한다. 어쩌란 말이냐.

그런데 도시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이현국씨 부부의 고추를 잊지 못하고 매년 찾는 것일까. 이 문제의 답을 얻고자 본인들에게 질문을 할 필요는 없다. 이 양반들이 고추를 다루는 손길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답은 절로 나온다. 멀리 시집간 딸에게, 혹은 아들에게 보내려고 하는 것만 같은 그 섬세한 손길은 종교와도 같은 그 어떤 진정성이, 숭고함이 느껴진다.

 

숙성중인 고추
숙성중인 고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정품 고추
정품 고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골라낸 희나리고추
골라낸 희나리고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고추 몇 근 보내주세요, 했다고 해서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매움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한 뒤에 보낸다. 뭘 잘 모르는 나는 고추라면 그저 청양고추와 일반고추, 그리고 꽈리고추와 오이고추 정도로만 구분하고 있었지만, 김치를 담글 때 사용하는 일반고추에도 매움의 정도가 여러 단계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상당히 매운 고추가 있는가 하면 적당히 매운 고추가 있고, 살짝 매운 맛이 느껴지는 게 있는가 하면 거의 매운 맛을 느끼기 어려운 고추가 있어서, 이현국씨 부부는 그 모든 종류의 고추를 따로 심고 따로 말리고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수요자의 주문이 있을 때 매움의 정도를 확인한 다음 적절히 배합해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내년부터는 우리도 이제 고추농사 이거, 줄이려고 해. 작년에 줄이려고 했지만 못 줄였으니, 내년에는 진짜로 줄여야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내 귀속으로 그런 말이 들려왔다. 마치 어디 멀리서 누군가가, 이현국씨 부부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 같았다.

다 마른 고추를 마당에 내놓고 희나리를 고르고 또 고르는 이현국씨 부부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정말로 고추농사를 줄일 수 있을까? 정말로 줄인다면 그 마음에서 피어나는 무지개는 몇 가지 색일 것인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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