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위클리서울=박석무] 지난 주말(9월 7일)은 우리들의 시인이자, ‘국토(國土)’의 시인 죽형(竹兄) 조태일 시인의 20주기였습니다. 태풍과 강풍이 몰아친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 아침 서울에서 곡성까지 버스 한 대로 많은 문인들과 함께 문학축전에 참석했습니다. 죽형은 고향이 곡성의 태안사라는 사찰이어서 그곳에 조태일 시문학관이 세워진 지 오래이고, 이미 ‘창비’에서 그의 문학전집까지 간행되었는데 금년에는 곡성군의 도움으로 문학상까지 제정되어 문학축전과 함께 제1회 조태일문학상의 시상식까지 함께 치르는 제법 성대한 문학잔치였습니다. 

조태일은 나의 막역한 친구였습니다. 고교 1학년 때부터 만나 40년을 함께 붙어 지내다가 그는 1999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떠난 지 20년이 되는 금년은 그와 내가 만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몇 년 전에 설립된 죽형조태일시인기념사업회의 책임자로 있는 것은 그와의 그 길고 뜨거운 만남과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박석무
박석무 ⓒ위클리서울

세상의 많은 사람은 다산은 실학자이고 경학자이고 경세가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은 그는 탁월한 시인이었다고 합니다. 한글 시인이 아니라 한문 시인이라는 것입니다. 떠난 지 20년이 되는 우리시대의 조태일도 탁월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다산 시를 좋아하고 또 다산을 한없이 숭모했습니다. 다산이 귀양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지금이야 ‘창비’로 판권이 넘어가 그곳에서 간행한 책으로 되어있지만, 애초에 1979년 가을, 시인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던 조태일이 출판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산 시의 대표작이라고 칭하는 ‘애절양’이라는 시 제목인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이름의 시선집을 82년 6월에 번역하고, 83년 2월에 간행해준 책도 시인사에서였습니다. 내가 ‘다산연구가’라는 어쭙잖은 명칭을 얻었던 것은 바로 조태일 때문이었습니다. 

“시성(詩聖) 정약용의 고상한 사상-예술성은 바로 그의 선진적 문학관과 실천 투쟁에 의하여 달성되었다.”(1962년 다산탄생200주년기념 논문집 : 신구현, 「다산 정약용의 창작과 문학적 견해」)라고 말한 북한 학자는 그때 벌써 다산에게 ‘시성’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쳤습니다. 송재소 교수 또한 그의 박사학위논문 「다산시연구』라는 글의 결론으로 “그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한글로 쓰인 어느 작품 못지않게 ‘민중적(民衆的)’이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을 맺어 민중성이 가득한 그의 문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조태일은 60년대의 군부독재, 70년대의 유신독재, 80년대의 전두환 독재에 맞서 자유와 인권, 평화와 통일을 그리워하면서 시대의 아픔에 한없이 분노해서 민중을 대변했던 많은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문학축전의 자리에서 “조태일 시는 씩씩하고 남성적이다. 참여시이고 저항시이며 민중시임은 분명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근원을 찾아내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그의 시는 깊은 감동과 떨림을 준다.”라고 민족·민중 시인에서 한걸음 더 들어가 국토와 고향,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밝히려는 높은 경지의 시인이었다고 평했습니다. 

시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작금의 우리 문단에는 조태일을 잇는 시인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다산 시정신, 조태일 민중시를 계속 이어가는 우수한 시인들이 많이많이 나오기를 고대해 봅니다. 그날 축전에 함께 해준 많은 분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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