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막바지에 내몰린 노숙인 희망 잃지 않도록 붙들어 줘야”
“인생 막바지에 내몰린 노숙인 희망 잃지 않도록 붙들어 줘야”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19.09.18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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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3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2회에서 이어집니다.>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 필리핀에서의 운영노하우도 쌓였을 것 같은데.

▲ 되도록 자체적으로 필리핀 사람을 책임봉사자로 세웠고, 장학생 아이들 엄마들 중에서 몇 명의 봉사자를 뽑았다. 한국인 자원봉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운영관리를 철저히 한다. 매일매일 현장에서의 봉사활동 사진과 식단, 그리고 시장에서 식품 구입 영수증 등을 카카오 톡으로 보고를 받고 있다. 운영비도 매월 두 차례 씨티은행에서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장학금지원은 1년에 네 차례 필리핀으로 직접 가서 전달하고, 필요한 물품 등도 지원한다. 지금은 카비테와 나보타스 두 곳 모두 장학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작지만 급식시설도 운영 중이다.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책장도 마련해 놓았고, 장학생과 엄마, 어린 동생도 함께 식사할 수 있게 했다.

 

- 본래 수도사 시절부터 교정사목을 한 것으로 안다.

▲ 2000년 11월인가 제가 있던 수도원에서 저를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으로 파견했다. 서울 구의동에 있는 출소자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25년 동안의 수도원생활을 접게 되면서 세상으로 환속(還俗)을 했다. 그러나 비승비속(非僧非俗) 신분이었다.

중도 아니고 속세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환속장(수도자 신분에서 평신도로 신분이 바뀜)을 받기 전까지는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2001년 4월초, 청송 2감호소에 있을 때 만났던 안드레아 형제가 나를 느닷없이 찾아왔다. 2000년 8월에 감호소에서 가석방으로 나왔지만, 8개월 동안 여기저기 다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의동 출소자의 집에 있는 평화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나중에 환속한 후에도 평화의 집에 계속 남아 있었지만,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와 재소자들을 위한 큰 걸음을 시작하게 됐다. 이 길이 나의 운명이 되었다.

 

가난하 아이들에게도 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이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서영남 대표.
가난하 아이들에게도 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이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서영남 대표 ⓒ위클리서울/서영남

- 민들레공동체 운영도 버거운데, 재소자 방문 어려움은 없나.

▲ 수도원 시절부터 교도소를 돌며 교정사목 활동을 해왔지만, 지금도 재소자 형제들과 편지와 전화를 나눈다. 틈틈이 매달 청송교도소로 면회를 가고 상담도 한다. 전국의 장기수 형제들을 만나러 다닌다.

그러다가 노숙하는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가 2008년이다. 가난하고 불우한 아이들을 도울 길을 찾았다. 그렇게 시작한 게 조그만 집을 얻어 만든 민들레 꿈 공부방이다.

나중에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과 작은 어린이 도서관인 민들레 책들레를 마련해 가난한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런 세월이 벌써 쏜살처럼 흘러 20여 년이 훌쩍 넘었다. 국내에서 청송교도소에 매달 두 번씩 면회를 다니다가 몇 년 전 부터 허리가 안 좋아 월 1회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 가족과 함께 음지의 교도소 방문을 해왔다.

▲ 매년 베로니카(부인)와 함께 여름휴가 철이면, 전국에 흩어진 재소자 형제들을 만난다. 2014년부터 5년간 베로니카가 모니카(딸)와 함께 교도소 방문을 해왔다. 제 나이 60이 넘으면서부터 허리가 안 좋아 딸 모니카와 교대로 운전을 한다.

청송교도소를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출발해 덕평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요기를 마친다. 청송 진보에 도착하면 오전 11시. 경북북부 3교도소 민원실에 면회를 신청한다.

면회가 끝나면 바로 진보시장에 가서 점심을 먹고 자매들과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오후 12시30분, 천주교 자매상담을 교도소 안에서 한다. 음식도 나누고 기도도 하고 성경공부도 한다. 모임을 마치면 민원실에 모임을 나온 재소자 형제들 영치금과 간식거리를 넣어준다.

자매상담에 나오는 형제들과 다른 교도소로 이감한 형제들에게 매달 3만 원의 영치금을 넣어준다. 모두 100여 명 정도 된다. 생일이나 세례명 축일에는 2만원을 더 보태드린다. 10여 년 전에는 속옷이나 운동화 선물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안경 외에 모든 게 금지되었다.

수감자는 영치금으로만 살 수 있다. 다른 재소자로부터 선물로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대다수 수감자들은 돈이 없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영치금을 만원에서 3만원으로 올려드렸다. 속옷이나 화장지라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돈이 없어 교과서와 동화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을 세운 서영남 대표
돈이 없어 교과서와 동화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을 세운 서영남 대표 ⓒ위클리서울/서영남

- 재소자에게 폭염은 힘든 계절인데.

▲ 지난 8월 폭염도 힘들었지만, 우리가 만나는 형제들이 무더위에 지쳐 있을 텐데, 여름보양식으로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어떤 지인께서 닭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부지런히 맛있는 닭백숙을 정성껏 준비했다. 면회소에서 닭백숙을 대접하는 날,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어찌나 맛을 음미하며 식사를 하는지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배고픈 다른 형제들이 애타게 자리를 기다릴 정도였다. 그릇이 모자라는 바람에 봉사자들의 설거지로 온 종일 땀방울을 흘리는 수고도 많았다. 그래도 맛있게 먹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힘든 줄도 몰랐다.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 청주교도소에 39세 때 20년형을 받은 베드로 형제가 있다. 석 달 후 만기출소 하지만, 어느새 환갑이 다 되었다. 그런데 얼굴은 편안하다. 15분간의 짧은 면회였지만,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벌써 15년이 넘었다.

청송에서 청주로 이감 온 후, 매년 한 번씩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다. 이제 교도소에서 만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하고 있다. 마지막 영치금과 접견 물을 넣어주었다. 하늘에서 시원하게 세찬 소나기가 내렸다.

정 안드레아 형제가 있다. 1994년 서울구치소에 사형수로 복역 중일 때 처음 만났다. 새파랗게 젊은 눈빛에 사나운 얼굴이었다. 빨간 명찰을 가슴에 단 까칠한 형제였는데, 다행히도 2007년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공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받았을 때,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다른 사형수를 볼 낯도 없고, 혼자 감형되어 미안하다 말 할 수도 없었다. 어정쩡한 상태로 한 달 반을 서울구치소에서 있다가 공주교도소로 왔다.

그때부터 무기수로 사는 것이 외롭고 적응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사형수였을 때는 차라리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와 도움을 주곤 했는데, 막상 무기수가 되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너무 섭섭하고 심적으로 어려웠다고 고백했던 일이 생각난다.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뽑아 작은 학교를 세워 학업의 길을 열어준 서영남 대표가 아이들을 환대하는 모습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뽑아 작은 학교를 세워 학업의 길을 열어준 서영남 대표가 아이들을 환대하는 모습 ⓒ위클리서울/서영남

- 노숙인과 재소자 구제에 역할을 다해온 민들레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를 말해 달라.

▲ 민들레국수집은 ‘손님’들에게 그날그날 끼니만 해결해 주는 곳은 아니다. 인생의 막바지 길로 내몰린 그들을 일단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주는 곳이다. 이들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하게 굶주리고 지쳐 있다. 어떤 희망도 빛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에게 자립할 비빌 수 있는 작은 언덕이 필요하다.

삶에 지치고 살아갈 힘을 잃었을 때, 희망과 용기를 되찾을 장소가 없다. 세상이 이들을 버렸지만, 민들레국수집은 이들을 버리지 않는다. 이들이 살아날 희망의 빛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독립된 주거공간을 마련해 준다. 약간의 용돈도 드린다. 노숙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민들레 집 정식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다.

 

- 오늘날 1% 자본 세력이 99%를 장악한 시대에 소외된 자들에 대한 ‘민들레의 역할’이 더 소중해진다.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다면.

▲ 앞에 말 한대로 ‘민들레의 집’은 처음에 그렇게 작게 시작했다. 99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겠다는 심정으로 단 한 사람일지라도 적극 도와드린다. 쉴 곳이 없는 분에게 여력이 닿으면 단칸 월세 방을 얻어드린다.

한명 돕는 일은 그리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그런 분들도 늘어난다. 작은 방이지만, 노숙생활에서 벗어나 차츰차츰 적응해 민들레식구가 되면 민들레국수집이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각자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다.

본인이 원하면 아무 때나 와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자율공동체 형태로 운영한다. 간섭도 되도록 하지 않는다. 각자 독립적이면서 어려울 때 서로 협력하는 민들레의 규칙만 지키면 된다. 민들레국수집은 먹는 문제를 넘어 영육(靈肉) 간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민들레의 소명’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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