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세상 속에…
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세상 속에…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9.09.1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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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서른두 번째 이야기 / 강진수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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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찍 태즈, 형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호스텔을 나서 버스에 올랐다. 차창에 기대 잠깐 잠이 들었을까. 따뜻한 아침 햇살이 차 안으로 스미고 고개를 들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이는 빙하의 모습,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빙하라는 모레노 빙하가 저 멀리에 희끗희끗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차가 멈춰 서고 아직은 멀리 떨어진 빙하를 앞에 둔 채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다. 5분 안에 얼른 사진을 찍고 다시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이것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빙하 바로 앞 전망대에 갈 뿐만 아니라 우리는 빙하 위를 오르는 트래킹도 할 테니까. 어쨌든 멀리 빙하를 드디어 마주하고 나니 우리는 마냥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큼은 무리해서 지출한 비용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버스가 전망대에 다시 멈춰 섰다. 나무 갑판으로 만들어진 전망대는 빙하 앞쪽으로까지 길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삐걱거리는 전망대는 세 곳의 메인 포인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속 걸어가면서 바로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풍경에 자꾸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세 곳 중 두 번째는 가장 빙하가 크고 넓게 보이는 구간이었다. 그곳에서 챙겨온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쉬기로 했다. 나와 형은 호스텔에서 어젯밤 싸놓은, 항상 먹던 방식의, 하몽 샌드위치를 꺼내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생각지도 못한 많은 지출이 있었기에 이렇게 점심 비용을 줄여서라도 남은 기간 예산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옆에서 태즈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자신이 챙겨온 비스킷을 꺼내 먹었다. 태즈는 원래 점심을 잘 챙겨먹지 않는다고 했다. 순식간에 조그마한 샌드위치를 해치우는 우리 둘을 보며 그녀가 자신이 먹다 남긴 비스킷을 건넸다. 직장인이었고 지금은 그 직장에서도 자유로운 그녀는 우리를 보며 자신의 학생 시절을 생각했을 것이다. 짧은 기간 아득바득 여러 나라에서의 일정을 견디며 여행 아닌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를 보며 그녀는 오래 전 자신의 치기와 욕심을 떠올렸을 것이다.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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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의 시간은 삼십분 만에 끝이 났다. 다시 버스로 돌아와 잠시 차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여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나만의 여행을 하다가 여러 사람과 투어를 하다 보니 피곤하기도 했다. 가이드 인솔에 따라 내렸다가 올랐다가 버스를 바꾸었다가 하며 계속 모레노 빙하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이드는 그동안 이곳 국립공원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야생 동식물들을 소개해주며 그들이 얼마나 희귀한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나 그 순간 큰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아껴야 할 장소라면 이렇게 투어를 개발하고 관광객들을 들이게끔 하는 것이 옳을까. 중요한 자연 유산이라고 몇 번이고 말하면서 이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버스들과 그들을 위한 아스팔트 도로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까 전 밟고 오르며 즐거워했던 전망대와 그곳의 나무 갑판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라는 특권은 그곳의 상황이 어떻고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곳의 자연은 어떻게 유지되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 없게끔 만들어준다. 완전히 눈이 가려진 채로 그저 즐길 것, 그저 사진 찍기 좋을 것들에 대해서만 잠깐 잠깐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우리는 유람선으로 갈아탔다. 빙하 주변을 빙빙 돌던 유람선은 빙하 바로 옆쪽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다시 바뀐 가이드는 우리를 인솔해 빙하 트레킹을 위한 시작점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와중에 태즈와 나, 형은 빙하를 바라보며 끔찍한 비명과 탄성 중간의 소리를 질렀다. 무슨 다큐멘터리 영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이 우리 앞에 순간 스쳐지나간 것이었다.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것이 나기에 소리 나는 쪽을 보았더니, 빙하의 일부분이 조각나 우르르 호숫가로 떨어졌다. 말이 일부분이지 어마어마한 크기의 빙하 조각이었다. 그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호숫가는 크게 일렁이며 해일과 같은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태즈가 이후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의 증거를 바로 눈앞에서 본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니 트레킹을 한다고 신나서 설쳐댔던 방금 전 나의 마음이 한가득 무거워졌다. 꼭 그 빙하 조각들이 내 가슴 안으로 밀려든 것처럼.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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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해주는 아이젠을 신고, 장갑을 끼고. 본격적으로 빙하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아이젠 덕분에 빙하가 가파르고 미끄러워도 어느 정도 다니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몇몇 구간은 정말 경사가 크고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미끄러웠다. 빙하 꼭대기 위로 올라서자 빙하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곡선 모양의 능선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꼭 다른 행성에 온 기분이 들었다. 비니쿤카를 올랐을 때에도 우유니와 아타까마를 거닐 때도 그런 느낌이었지만, 그들과 또 다른 행성의 느낌이었다. 차갑고 얼음뿐인, 그 어느 것도 자라지 않는 행성.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얼음 행성이 문득 떠올랐다. 전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알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주인공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빙하 위에는 꿋꿋이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었다. 작은 곤충이 유일하게 빙하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푸르게 빛나는 크레바스 사이에서 기어 나와 다른 쪽의 빙하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엔 신기루 같은 것인가 했는데 조금 더 가서 몇몇을 더 발견하자 그제야 이곳에도 진정한 주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작은 생명이 이곳의 진짜 주인인 것이다. 이런 극한 속에서도 무언가 살아간다는 것이 경이로운 동시에, 잔뜩 상상하고 있던 새로운 미지의 행성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오히려 아무 것도 살아가지 않는다는 게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세상 속에’ 라는 김광석의 노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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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의 끝에선 유리잔에 빙하 얼음을 담아 위스키를 조금 부어 나누어 주었다. 지치고 추운 몸에 위스키 한 모금은 물론 좋았지만, 이 한 잔의 술을 위해 그 많은 비용을 치르고 그 많은 자연을 해치며 이곳에 왔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평생 보지 못했을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를 트레킹하며 불에 모조리 탄 하얀 나무들의 숲을 보았을 때의 감정이 얼핏 교차하고 있었다.

저녁 늦게 호스텔에 다시 돌아와 어제 사놓은 음식들로 마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태즈에게 미리 작별 인사도 했다. 엘칼라파테를 떠나는 것에는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이곳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누군가에 의해 모두 정해져 있는 기분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택시에 몸을 싣고 공항을 향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니 피곤해진 우리는 늘 그렇듯 잠에 들었다. 잠든 사이에 비행기는 말없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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