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는 언제부터 제사를 ‘다시’ 지냈을까?
천주교는 언제부터 제사를 ‘다시’ 지냈을까?
  • 김유철
  • 승인 2019.09.25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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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김유철 칼럼

[위클리서울=가톨릭일꾼 김유철] 

조선인이 생각했던 제사의 중요성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 한가위가 지나갔다. 명절을 지내는 각 가정의 모습은 다양하기 이를 때 없다. 아직도 언론은 귀성과 귀경 모습을 취재하러 서울역이니 고속터미널로 나가는 고전적 보도를 반복하지만 명절을 보내는 분위기는 엄청나게 변한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독도경비대원들은 풍랑 속에서도 제사를 올리고, 실향민들이 몰리는 임진각 망배단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교도소 재소자들도 명절 합동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제사를 중요시하는 민족이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는 봉건적 신분제 사회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족과 관리가 되어 나랏일에 참여하는 문반(동반)과 무반(서반)으로 구성된 양반(兩班)이 상위계급을 형성했고, 양반과 상민 중간에서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인. 그리고 농업·어업·수공업·상업에 종사하며 군역을 지고 세금을 내는 상민과 최하층 신분의 노비인 천민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현재에도 남북한 모두에게 이어지고 있는 유교식 제사는 조선시대 양반 이상의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으로서 통상 4대까지 제사를 지냈으며 그 윗대의 제사를 모실 때는 임금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이를 불천위(不遷位)제사라 불렀다. 자신의 문중에 불천위제사가 많은 것을 명문가의 영광으로 삼기도 했다. 상민은 1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가난하여 제사를 못 지내는 상민을 지원하는 구휼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사’는 조선 사람들이 중요시 여기는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위클리서울/김승현 기자
ⓒ위클리서울/김승현 기자

북경에서 날아온 청천벽력 ‘제사금지!’
공식적으로 조선 사람이 천주교 세례를 받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든 것은 1784년이다, 역사적으로 ‘정치개혁’을 실현하며 왕도정치를 새롭게 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시절 이 땅에 천주교가 드디어 몸을 드러낸 것이다. 익히 아는 바처럼 신진사대부 중 남인 성호학파의 녹암계 양반 남자들로 시작된 천주교인들은 초창기 모임장소였던 이벽 세례자 요한의 집(서울 중구 수표동)을 벗어나면서 중인과 상민과 천민까지 합세했고 이어 지방으로 확산되는 전교 과정을 거쳤다.

선교사가 아닌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하고 평신도 성직자단(교회는 이를 가성직이라고 부른다)을 만들고 각종 성사를 베풀던 초기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행위가 교리적으로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을 스스로 점검하게 되었고 1789년 당시 예비신자였던 윤유일이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라자로회 로(N.J.Raux)신부를 만나고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신자들의 상황을 전달했다. 윤유일은 1790년 2차로 다시 북경을 다녀왔다.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의 서신은 조선천주교회에 대한 최초의 사목교서라 할 수 있다. 1789년 1차 답변에서는 조선 신자들에 대한 격려와 함께 평신도 성직자단 금지였고, 1790년 2차 답변의 결론 중 하나는 “제사금지! 제사금지!! 제사금지!!!”였다. 조선천주교회 창립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양반 남자들의 충격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은 위에 말한 조선시대 제사에 대한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훗날 <조선천주교회사>를 쓴 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 (Claude Charles Dallet) 신부는 이 제사금지령이 “조선의 모든 계층의 눈을 찌른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문제는 1790년 조상제사 금지령의 여파다. 제사금지령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791년 10월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연루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른’ 진산사건이 벌어진다. 분명한 것은 이 진산사건이 조선 정부와 유교사회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선을 천주교가 넘어선 것으로 판단하고 거기에 정치적·사회적 여러 의미가 덧붙여지는 상상할 수 없는 박해의 시작점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제사허용은 국제정치의 부산물?
이제 본 칼럼의 제목으로 돌아갈 시점이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언제부터 제사를 ‘다시’ 지냈을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도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개신교는 제사를 철저히(!) 지내지 않고, 천주교는 제사를 허용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은 알고 있다. 한 발 더 들어가서 보면 천주교인이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한국 천주교 주교위원회에서 2012년 4월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지침과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절차>를 발간하였고 주교회의는 그 해 춘계 정기총회에서 이를 승인하였다. 물론 이것이 최초의 제사 허용은 아니다. 그것은 천주교인들이 여러 모습으로 실행하고 있던 제례의 혼돈과 혼란(?)을 새삼 정리한 것이다.

사실 제사 허용의 조짐은 20세기 들어와서 바티칸의 입장을 변하게 만들었다. 교황청은 1939년 12월 8일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공포하였다. 즉 조상제사를 허용한 것이다. 이 훈령은 교회 기관지인 <경향잡지> 1940년 2월호(919호)에 게재되었고, 같은 해 7월 조선교구장들은 <조선8교구 모든 감목의 교서>에서 조상제사에 대한 허용조치를 “교회의 신앙도리가 변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말라”며 교회의 도리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다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제사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이 변했기 때문에 용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교황청의 이러한 제사 허용 방침이 극동 아시아 민중에 대한 선물이 아니라 군국주의를 앞세운 국제정치의 힘에 눌려서 마지못해 나온 부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조상제사 허용에 앞서서 이미 교황청은 일본의 신사참배를 먼저 허용한 사실이 있다. 조상제사에 관한 훈령 3년 전인 1936년 5월 26일 교황청 전교성생(포교성)에서 일본의 신도예식(신사참배)을 허용하는 교령을 공포한 바 있다.

시복시성보다 ‘용서’를 먼저 청하자
교종 프란치스코가 2014년 한국을 방문한 주목적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이었다. 또한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역시 103위 시성식을 위함이었으니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교황청의 시선은 한국이 전교국가로서 이만큼 성장하게 된 계기가 ‘순교’로서 생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그 ‘첫 순교'의 출발이 교황청을 대리한 조선교회를 관할하는 북경교구장의 조상제사금지령이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면 그것에 대한 판단을 지금이라도 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2000년 3월 당시 교종 요한 바오로2세는 ‘용서의 날 미사(The Day of Pardon Mass)’를 로마 바실리카 성당에서 집전하며 21세기가 오기까지 교회가 잘못 판단한 것을 ‘죄’라고 표현했다. 그 기도문 안에 ‘타 문화와 전통에 대한 멸시’를 용서 청했다. 그러기에 한국천주교회 초창기에 죽어간 숱한 ‘조선인’ 천주교인들에게 우리는 시복시성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의 그릇된 판단에 대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용서의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조상제사에 대한 18세기의 관점과 21세기의 관점이 다를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하느님나라는 분명 ‘삶’을 위한 축제이기 때문이다. 순교자성월을 보내며 우리 주 예수의 말을 필자의 목소리로 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교리는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교리를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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