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공기가 선선해지면 올라오는 꽃대궁
공기가 선선해지면 올라오는 꽃대궁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꽃무릇이 꽃대를 쑥쑥 올리기 시작할 즈음이면 선운산 단지 상인들의 마음에 물이 오른다. 여름 내내 손님 구경을 못해서 팍팍해져 버린 마음에 촉촉한 물기가 스며들어 웃음도 절로 나온다. 하지만 나는 꽃무릇이 올라올 때가 되면 아연 긴장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고양이가 우리 집 마당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한 이후로 생긴 일종의 계절병이다.

“저 써글놈의 사냥꾼 고양이들이, 어쩌자고 저 연약한 꽃무릇을 마구 짓밟는단 말이냐.”

하루에도 몇 번씩 터져 나오는 나의 욕잔소리를 고양이들은 당연히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름 한 철 더위에 허덕거리며 잠이나 퍼자다가 꽃무릇이 올라올 때가 되면 선선한 바람 속을 마구 내달리기 시작하는 고양이들은 마치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이, 일 초에 십여 미터씩을 단숨에 내달리며 연약하기 그지없는 꽃무릇 대궁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꺾어서 짓이겨놓는다.

바람만 세게 불어도 툭 부러질 정도로 물기를 가득 머금은 꽃무릇들 사이에 개구리가 있고, 도마뱀이 있고, 메뚜기가 있으며 두꺼비도 있어서 고양이들의 사냥본능 같은 것을 깨워놓는다는 것을 나도 알고는 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하여 귀를 곤두세우고 발톱을 휘두르는 고양이 특유의 본성을 감히 내가 어떻게 해볼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하릴없이 속상해나 하며, 내 어쩌자고 저놈의 고양이들을 받아 들였던가 어쩌고 그런 쓸 데 하나도 없는 후회나 곱씹을 따름이다.

물론 신경이 아주 날카롭게 곤두설 때는 막대기건 돌멩이건 아무 것이나 들어서 내던져 보기도 한다. 그래봐야 무슨 소용일 것인가. 고양이는 택도 없는 짓 그만 하라는 듯 나무 위로 뽀르르 올라가서 야옹, 야옹, 소리로 나를 비웃어대고, 내가 던진 돌멩이나 막대기에 얻어맞은 꽃무릇은 고양이가 밟았을 때보다 더 많이 꺾어지고 짓이겨져서 나를 황당하게 하는 것을.

오래 전부터 꽃무릇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에는 지나치게 붉은 꽃무릇 특유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무서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뭐랄까, 그것은 어쩐지 꽃상여를 연상시키는 등 죽음과 친애한 꽃인 것만 같아서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와 단둘이 함께 살면서부터 그 꽃을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한참씩 바라보게 되었다.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돌보는 손이 없어 폐허가 된 사당 근처에 산재한 꽃무릇 알뿌리를 욕심껏 캐다가 마당에 심기도 했다.

“와따야 이것이 믓이당가?”

 

국화 속에도 한 송이 꽃무릇이
국화 속에도 한 송이 꽃무릇이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징허게 빨간 이 모습이 무섭기도
징허게 빨간 이 모습이 무섭기도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꽃무릇 알뿌리를 잔뜩 캐 와서 마당에 심자는 나의 말에 어머니가 보인 반응이 그것이었다. 엄청난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기쁨에 잔뜩 겨운 목소리를 내며 눈빛을 반짝이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즈음의 어머니는 사람이 놀면서 밥을 먹으면 안 된다고, 밥값을 해야 하는데 할 일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등의 혼잣말을 마치 직업처럼 하고 계셨더랬다. 그러던 중에 꽃무릇 심기라는 전대미문의 일거리가 생겼으니 절로 어깨춤이라도 출 만했다.

어머니는 그 많은 꽃무릇 알뿌리를 단 하룻만에, 한꺼번에 다 심어버리겠다는 듯이 대단한 열정으로 호미질을 하고 계셨지만, 나로서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것을 다 심어버리고 나면 다시 또 할 일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둥의 혼잣말로 밤잠을 못 이루실 게 뻔했다. 어쩔 것인가. 모처럼 개발한 일거리를 너무 빨리 소비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꽃무릇 알뿌리 대부분을 감춰두고 날마다 조금씩만 내놓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갈 것인가. 나중에는 이미 심어놓은 알뿌리를 도로 캐서 다시 심는 일종의 ‘쇼’를 연출하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내 자신의 그런 행위가 맹랑하다 싶으면서도 제법 기특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무렵에 발견한 것이 두꺼비요 개구리였다. 예전에도 두꺼비와 개구리는 당연히 집안 어딘가에 있었겠지만 보면서도 못 보고 지나쳤다고나 할까, 아무튼 의식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부터였다. 두꺼비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고, 개구리 역시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내 눈에 무슨 콩깍지 같은 것이라도 끼었던 것인지 두꺼비는 이상하게도 예뻐 보였고, 개구리는 이상할 것도 없이 주변 사방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개구리가 아니었다.

일단 개구리의 사이즈가 엄청나다 싶을 정도로 길고 뚱뚱했다. 이렇게도 큰 개구리가 우리나라에 있을 수도 있구나 싶어 검색을 해 보았더니 그 수명이 세상에나, 십오 년 남짓이고 두꺼비의 생애는 사십 년 이상이란다. 그런데 우리 집의 두꺼비는 아직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보고도 달아날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만져보고 싶었고, 만지고 난 뒤에는 그 우둘투둘한 녀석을 방으로 데려가서 좀 더 가까이 오랜 시간 보고 싶었고, 방으로 데려온 뒤에는 ‘두꺼비 파리 삼키듯 한다’는 속담이 생각나서 파리를 잡아줘 보기로 했다.

 

걸어가는 두꺼비
걸어가는 두꺼비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두꺼비가 멀리 가버리지 못하도록 커다란 유리병에 넣어놓고 파리를 잡아서 줘봤지만 두꺼비는 눈만 끔뻑거릴 뿐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의 한 말씀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일거리를 개발하게 하였으니, 두꺼비는 눈이 안 좋아서 죽은 것은 보지도 못 하고 오직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만 잡아먹는다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와 더불어 파리를 생포하는 일로 몇날며칠을 신나게 보낼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음식 찌꺼기를 방안에 늘어놓고 파리를 유인해서 잡기도 했으니, 이 또한 지금 생각하면 감격스럽기만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두꺼비와 개구리는 해마다 조금씩 몸집을 키운 모습으로 내 눈에 띄었다. 개구리는 헤아린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고, 두꺼비는 최소한 다섯 마리까지는 확인이 가능했다. 특히 두꺼비의 성장은 괄목할 만해서, 나는 해마다 봄이 되면 두꺼비를 찾아서 거의 매일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어쩐지 그랬다. 개구리나 도마뱀, 도롱뇽 같은 녀석들은 눈에 띄어도 내 마음에 각별한 무슨 감흥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꺼비는 보기만 하면 그냥 쪼그려 앉아서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오랜 시간 들여다본다. 이런 나를 두고 어떤 사람은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투로 눈을 깜빡거리며 묻는다. 그거 뭐 대단한 별거라고 그렇게 들여다보느냐고, 이런 질문 앞에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그저 히죽이 한 번 웃어나 줄 뿐이다. 할 말이 없어서 못 하는 것도 아니다. 가슴속에서,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말을 다 하기로 하자면 아마 사흘 낮밤을 다해도 못할 것이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으냐고 묻는다면 글쎄 뭐, 딱히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보물 같은 두꺼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우리 집 마당을 차근차근 점령해 들어오기 시작한 뒤로 생긴 안타까운 변화였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범인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했었다. 두꺼비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이유가 뭘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이나 품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 마음이란 참 기이한 것이다. 툭하면 개구리를 잡아다가 보란 듯이 토방에 내려놓고, 도마뱀을 잡아다가 놔두는가 하면, 심지어는 뱀도 잡아다가 전시해놓는 고양이를 보면서도 두꺼비 또한 이런 식으로 사냥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지는 못하고 두꺼비가 왜 사라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나 품고 있었으니, 내 마음의 이런 상태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최소한 열 살은 됐을 두꺼비
최소한 열 살은 됐을 두꺼비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물론 어렴풋이나마 추론은 가능하다. 두꺼비는 다른 동물에 비해 유난히도 특이하게 생겼으니 고양이도 차마 건들지 못할 거다 하는 근거가 전혀 없는 믿음 같은 것이 아마 내게 있었다. 나의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사정없이 깨트리는 사건이 금년 봄에 일어났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고양이 한 마리가 이상한 액션을 취하고 있었다. 쥐를 잡을 때의 긴장한 모습도 아니고, 새를 잡았을 때의 신나는 포즈도 아닌, 그야말로 이상한 긴장감이 한눈에도 척 느껴지는 고양이 녀석을 멀리서 발견하고 살금살금 다가서다가 두꺼비를 보았다.

두꺼비는 고양이에게 아무런 적대감정이 없다는 듯 묵묵히 한 걸음씩 앞으로만 가고 있었지만, 고양이 녀석은 그 뒤를 따라가며 앞발로 한 번씩 툭툭 치고 있었다. 생긴 것이 너무 낯설고 두렵다는 듯이, 대번에 덤비지는 못 하고 앞발로 한 번 툭 치고 뒤로 물러섰다가 또 한 번 툭 치고 물러서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고양이를 나는 거두절미하고 뒷덜미를 잡아서 두꺼비로부터 멀리 떼어놓았다.

“이것들이 그냥 우리 집 마당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는구나.”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문득 백선엽이란 이름의 직업군인이 생각났다. 납북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빨갱이를 소탕한답시고, 견벽청야라는 작전명을 세워놓고 푸른 나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죽여 없애라고 했던 군인, 이 군인이 고창의 상하면과 공음면에 와서도 그런 잔악무도한 살상행위를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고, 공음에는 위령탑도 세워져 있는데 공당의 대표인 황교안씨가 그 사람을 찾아가서 참군인 중에 참군인이라고 추켜세웠다든가 어쨌다던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잡고자 하는 고양이와 백선엽의 견벽청야 작전명이 어찌면 그리도 닮은꼴로 느껴지던지, 더 이상은 고양이 녀석들 꼴도 안 보겠노라 다짐까지 했었다.

하지만 어쩌랴. 고양이들은 여전히 나만 보면 달려와서 앵앵대며 자신의 몸을 내 발등에 비벼대고 있었고, 나의 다짐은 하루도 못 가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내 마음에 의문은 이제 풀렸다. 그리하여 나는 난감해졌고, 서글퍼졌다. 고양이, 고양이, 내가 좋아하는 꽃무릇을 사정없이 짓밟아대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두꺼비마저 사냥감으로 파악하고 덤비는 고양이, 고양이, 내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

 

밖으로 나가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밖으로 나가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짓이겨진 꽃무릇 대궁을 보며 쓴입맛이나 쩟쩟 다시던 어느 하루 개구리가 고무 통 안에서 허둥지둥하는 장면을 보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통은 높이가 일 미터도 넘고 직경 또한 일 미터에 근접한 매우 큰 것이었다. 국화 모종을 비롯한 이런저런 화초에 물을 줄 목적으로 받아놓은 물이 오분의 사 이상 차 있기도 했다. 내 상식으로만 보자면 개구리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에 개구리를 굳이 잡아서 그 안에 넣어둘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개구리는 고무 통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자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고무통의 구조상 개구리가 밖으로 나갈 가능성은 글쎄, 모르긴 몰라도 거의 없어 보였다. 사람이 개구리를 잡아서 통 안에 넣은 것이 아니라면, 개구리가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일 텐데 들어갔으니 나오는 방법도 있지 않겠는가. 내 비록 개구리가 통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오는 장면은 볼 수도 있으렷다?

나는 자못 흥미가 진진해져서, 개구리가 어떻게 통속을 빠져나오는지 보겠다고, 이 미터쯤 떨어진 매화나무 그늘 아래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서 보고 또 보기를 두 시간도 넘게 했건만, 녀석은 여전히 허둥지둥하는 자세로 헤엄이나 치고 있고, 해는 어느새 매화나무를 지나서 날카로운 가을빛을 내리쏘기 시작했다. 사나운 태양빛을 피한다는 생각도 없이 피해서 자리를 떴다가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니면 두 시간? 아무튼 한참 뒤에 개구리가 생각나서 달려가 보니 세상에나, 개구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갔나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갔나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이게 뭐지? 어떻게 나간 거야?

그날은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답은커녕 가능한 추론조차 못해본 채로 눈이나 끔뻑거리고, 고개나 수없이 갸웃거리며 허헛 참, 허헛 참, 소리나 끝도 없이 중얼거리다가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자다가 문득 깨서 고양이를 생각했다.

혹시 고양이의 공격을 피해서 달아나던 개구리가 순간적으로 어떻게 고무 통 안으로 뛰어 들어간 것은 아닐까? 사람도 위험을 극단적으로 느끼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듯이, 고양이에게 쫓기던 개구리가 일 미터도 넘게 점프를 해서 물이 찰랑거리는 고무통 안으로 피신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내가 보고 있을 때는 통 안에서 허둥거리기만 할 뿐 도무지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개구리가 어떻게 빠져나간 것이지?

가을날의 백일몽이라고나 할까. 내 의문은 깊어만 간다. 너무 깊어서 쉽게 헤어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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